해남신문/해남을빛낸사람들

김준태(5·18재단 이사장)

희망의 시작 땅끝해남 2011. 6. 29. 10:32

김준태(5·18재단 이사장)
5월의 아픔을 몸으로 겪은 대표적 '5월 시인'
2011년 05월 09일 (월) 11:28:11 해남신문 hnews@hnews.co.kr

5월, 다시 5월이 돌아왔다.
적어도 광주전남 이쪽 사람들에게 5월은 1년 열두 달 중 그냥 평범한 어느 한 달이 아니라, 도장을 찍듯이 마음속에 '인권과 평화'라고 각인해버린 그런 달이다. 5월 첫 주 금요초대석의 주인공은 김준태시인(63)이다. 화산면 출신, 해남의 아들이자 광주의 아들이고, 민족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요즘 5·18기념재단이사장으로 광주민중항쟁 주역들의 제일 큰 형님 노릇을 하고 있다.
31년 전, 서른 두 살의 김준태는 나이만큼 새파란, 보리밭이나 마늘 싹 같은 푸른 생명을 노래하는 시인이었고 고등학교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광주시민항쟁의 한 복판에서 피눈물 흘리는 시민들을 보았고, 또 그걸 말없이 지켜보는 무등산을 보아버린 것이다. 5·18 직후 전남매일신문 1면에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발표하면서 신문사는 신문사대로 2개월 후 폐간이 되고, 그는 교사직을 강제로 물러나야 했다. 이후 그의 삶은 예전과 달라졌다. 스스로의 표현대로라면 파란만장한 세월을 살았지만, 5월의 아픔을 직접 몸으로 겪은 대표적인 '5월 시인'으로, 해남과 광주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문화운동사에 뚜렷하게 그 이름을 새겨놓고 있다.

 

   
 
  흙을 만지면 비록 해남의 흙이 아닐지라도 따뜻하고 척척한 느낌이 손을 타고 전해져 말할 수 없는 시적 엑스타시를 경험한다는 김준태 이사장. 그래서 우리는 그를 역사시인이며 고향시인이고 밭의 시인이며 통일 시인이라고 부른다.  
 
늦었지만 제10대 5·18재단이사장 취임을 축하합니다. 그동안 대부분 학계, 정계인물들이 이사장직을 맡아 오셨는데 시인으로서 5·18재단을 이끌어가게 되신 게 흥미롭군요.
5·18기념재단 역대 이사장은 지난 1994년 창립한 이후 초대 이사장에 조비오 신부, 이기홍 변호사, 김동원 전 전남대 교수, 윤영규 전 전교조위원장, 이광우 전 전남대 교수, 강신석 목사, 박석무 전 국회의원, 이홍길 전 전남대 교수, 윤광장 전 전교조 해직교사가 역임하셨지요. 벌써 윤영규 선생님과 이광우 교수님은 저 세상으로 가셨네요.

지난 30년 동안 재단은 5·18광주항쟁의 역사적 자리매김과 5월정신 계승이라는 무거운 책무에 시달렸죠? 지금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고 보십니까?
5월 정신, 광주정신은 완성된 게 아니라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5월에서 민주주의로, 민주주의에서 통일로 이어져야합니다. 우리나라는 분단 때문에 모든 비극이 발생하고 있어요. 그렇기때문에 민주주의가 완성되려면 통일이 돼야 합니다. 임기동안 오월정신의 가장 큰 덕목인 대동정신을 살리고 당시 시민들이 죽음 속에서도 하나가 됐던  아름다운 광주 정신을 회복하는데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5·18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난 후 온 국민들은 군사독재의 종식과 함께 민주화가 진전될 걸로 알고 상당히 들떠있는 분위기였죠? 시인의 감수성으로 그 때 무엇을 예감하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틈틈이 시위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큰 비극이 올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시위기간 중 금남로에서 가슴 한 복판에 총을 맞고 죽어가는 청년들을 보았어요. 또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대문에서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다 총에 맞아 죽은 최미애씨가 바로 동료교사의 부인이었지요. 문상을 가서 저는 차마 귀를 막고 싶은 기막힌 얘기들을 직접 들었습니다. 나는 세 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잇달아 타계하면서 조부모 손에서 컸어요. 할머니는 대흥사 절간을 내 집 정지(부엌) 드나들 듯 그곳에서 사시다시피 했었습니다. 말끝마다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마라"고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주었지요. 내 시의 주제인 생명 중시의 정신은 오로지 할머니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눈앞에서 소중한 생명들이 처참히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으니 어떠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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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 1948년 전남 해남군 화산면 대지리 출생
● 화산남초등학교, 화산중학교졸업
●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졸업
●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졸업

경력 및 사회활동

● 76.3~ 88.7  용남고, 학다리고, 전남고, 신북중, 광주과학고 교사(독일어, 영어)
● 80. 6  광주항쟁詩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발표로, 보안대에 붙들려가 강제해직
● 86.11~87.7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영암군 지부장
● 88.8~ 97.12 전남일보편집국 부장, 광주매일편집국 부국장
● 96.3~ 99.2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 04.~06.12   5·18민주유공자항쟁동지회 상임회장
● 10.6~10.11  장휘국 광주광역시 교육감 당선자 인수위원장
● 98.3~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
● 03.4~ 현재  광주 금남로에 작은학교 '김준태
  Lykeion' 마련, 집필활동
● 11.1~ 현재   5·18기념재단 이사장

문단활동

● 1969.1  전남일보와 전남매일 신춘문예 각각 詩당선
● 1969.11  월간 '詩人'지에 <머슴> <詩作을 그렇게 하면 되나> 외 3편으로 중앙문단등단
● 1983  광주문학상 수상
● 1985  현산문학상 수상
● 1995  제38회 전라남도 문화상 수상(문학 부문)
● 1990.1992.1993,2001  중국·유럽·미국 등지를 150일 동안 문학취재, 한국문학과 한반도현대사 강연
● 1992  5·18항쟁 최초 창작판소리 <무등진혼곡>대본 창작발표
● 1996  <문예중앙>에 중편소설 <오르페우스는 죽지 않았다>로 소설문학 데뷔
● 1999  5·18항쟁 최초 창작오페라 <무등둥둥>대본 창작발표
● 1999  시전문지<시의 나라>제정 '제1회 자랑스런 시인상'수상
● 1998~현재 광주·전남작가회의회장, 상임고문.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한국작가회의  자문위원

저서

●『참깨를 털면서』(창작과 비평사, 1977)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한마당, 1981)
●『국밥과 희망』(풀빛, 1984)
●『불이냐 꽃이냐』(청사, 1986)
●『넋통일』(전예원,1986)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실천문학사, 1988)
●『오월에서 통일로 』(빛고을 출판사,1989)
●『칼과 흙』(문학과지성사,1989)
●『통일을 꿈꾸는 슬픈 色酒歌』(미래사, 1991)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창작과 비평사, 1994)
●『지평선에 서서』(문학과 지성사, 1999)

항쟁이 끝나고 중단됐던 신문들이 발행되면서 첫날, 6월2일자인가 전남매일에 이사장님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게재되어 광주시민들의 아픔을 어떤 글보다도 생생하게 전달해주었죠. 그 때의 상황을 좀 설명해주시죠.
오전 9시경 신문사에서 연락을 받고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딱 50분 만에 230행이나 되는 장문의 시를 썼어요. 결국 계엄군의 사전검열에 시 전문은 게재되지 못하고 30행 정도로 줄어버렸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시는 내가 쓴 시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내 몸속에 들어와 마치 접신하듯 단숨에 써진 것 같아요. 검열로 많이 잘렸지만 광주시민들의 아픔을 어떤 글보다도 생생하게 전달해줬고 칼보다 강하다는 시의 힘을 느끼게 해줬던 것으로 저도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전 9시경 신문사에서 연락을 받고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딱 50분 만에 230행이나 되는 장문의 시를 썼어요. 결국 계엄군의 사전검열에 시 전문은 게재되지 못하고 30행 정도로 줄어버렸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시는 내가 쓴 시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내 몸속에 들어와 마치 접신하듯 단숨에 써진 것 같아요. 검열로 많이 잘렸지만 광주시민들의 아픔을 어떤 글보다도 생생하게 전달해줬고 칼보다 강하다는 시의 힘을 느끼게 해줬던 것으로 저도 기억이 새롭습니다.

시인으로서 일관되게 추구해오고 있는 주제는 무엇이며 시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어떠했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달밤'이라는 시를 썼던 기억이 있고 화산중학교 2학년 때 국어선생님인 윤전하선생님한테서 '시인이 돼라'는 칭찬과 격려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보다 영향을 받았던 분은 조공술선생님이라고 평양사범학교를 나오신 역사 선생님입니다. 그 분의 처남이 우리가 잘 아는 함석헌 선생님이셨는데 어느 해 우리 학교를 방문하셔서 2시간동안 강연을 했지요. 어린 마음에도 크게 감명을 받았고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후 닥치는 대로 독서를 했습니다. 중학교 때 이미 세계문학전집이나 형님이 보시던 사상계를 읽었으니까요.

해남은 김준태 시인을 비롯해서 김남주, 고정희 같은 민중시의 뿌리가 있는 곳인데 해남이라는 지역성과 민중시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글쎄요. 내 마음 속의 해남은 매우 유순한 동네라는 생각입니다. 물산이 풍부해서 사람들이 아등바등하지 않고 서로 돕는 풍조가 있지요. 서산대사도 "내가 죽거든 유물을 3재(災)해를 피할 수 있다는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 보관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선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인과 문인이 해남에서 나왔지만 정작 해남이 시의 고향인 것은 배출된 시인의 숫자 때문이 아니라, 푸른 바다에 둘러싸인 넓은 밭과 땅끝이라는 공간적 절박함이 주는 시적 정서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김지하 시인과 소설가 황석영 선생도 한동안 해남에 머물며 작품을 썼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고은 시인도 '땅끝'을 노래했지요.

고향, 화산면은 어떤 곳입니까? 고향이 시세계에 미친 영향은?
대지리 마을 앞쪽에 예전에 봉홧불을 올리던 동산이 있고, 산에 오르면 쾌청한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 꼭대기가 보이는 순수한 자연이죠. 동네에서 학교까지 9㎞길을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걸어서 다녔어요. 시집 못간 처녀가 죽으면 원혼이 되어 떠 다닐까봐 사람들 발길이 닫는 길 아래에 묻고, 정월에 죽거나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자는 바로 매장하지 않고 풍장을 하는 풍습이 남아있었어요. 지금 풍장은 없어졌지만 땅을 신성시했던 농경사회의 전통은 여러 곳에 남아있고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독특한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다'라는 내 시의 중심사상도 바로 고향에서 비롯된 것이죠. 내 시의 근원은 흙과 바다… 지금도 시를 쓰려면 고향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영감이 밀려오기를 기다립니다.

김원자 <편집고문·언론인·호남대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