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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물개로 불리던 조오련씨에 버금가는 자랑스러운 해남출신 여성체육인 박미희씨. 한때 '코트의 여우'에서 1남1녀의 어머니로, '배구해설의 여우'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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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7일 막을 내린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제대회의 마지막 경기는 항상 마라톤이 장식하곤 했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엔 여자배구가 맨 마지막 날 경기를 했다. 중국은 국민적 열광이 드높았던 여자배구로 마지막을 극적으로 이끌 셈이었던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여자배구경기는 중국이 금메달, 우리나라가 은메달을 차지함으로써 중국의 기대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날, 아시안게임 폐막식 직후 때마침 왕년의 국가대표배구선수를 지내고 현재 KBS N(스포츠전문채널)배구해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화산면 출신 박미희 위원(48)을 만나기로 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우리나라 여자배구는 결승전까지 갔지만 지난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는 역대 최하의 경기를 보였고, 2008 베이징올림픽에선 본선티켓 마저 놓침으로써 실추된 한국여자 배구의 위상을 새롭게 다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때문이었다. 한편 금요초대석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해남출신 재경인물들 중 여성을 꼭 한번 초대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미희 위원과 여성체육인으로서의 애환, 그리고 한국여자배구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아시안게임으로 많이 바쁘셨습니까?
아닙니다. 전 이번에 중계가 없어서 광저우에 가지 않았어요. 뉴스를 통해 광저우소식을 듣는 정도였죠. 방금 전에 들었는데 여자배구가 은메달에 그쳐 퍽 아쉽게 되었네요. 그러나 이 정도로 메달확보를 한 것도 잘했다고 봅니다. 그동안 배구협회와 선수들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걸 알겠어요.
박위원님은 청소년국가대표선수는 물론 프로로써 국제경기에 대표선수로 많이 활약하셨죠? 그 때가 우리나라 여자배구의 전성기 아니었습니까?
여자배구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구기 종목 메달을 획득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것인데, 그 후 90년대 들어 호남정유(현 GS칼텍스) 출신 장윤희, 홍지연, 이도희 등의 선수들이 국내대회를 평정한 뒤, 이들이 주축이 된 대표 팀이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중국을 이긴데 이어, 개최국인 일본마저 물리치면서 감동의 금메달을 따낸 바 있습니다.
저는 1982년 멕시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 우승멤버로 이듬해 여자실업배구 대통령배에서 신인왕을 차지하며 '코트의 여우'란 소리도 그 때 들었습니다. 1984년과 88년 두 차례 올림픽 대표선수로 출전했지요.
'코트의 여우'란 별명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제 키가 배구선수로선 작은 축에 해당하는 1m74cm예요. 신체적으로도 '약골'이었고요. 그걸 극복하려다 보니 머리를 쓸 수밖에 없었죠. 꾀가 많다고 해서 '여우'라고 그랬대요.
신체적 조건이 크게 좋지 않은데 어떻게 해서 배구선수생활을 하시게 되었나요?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겠지만 그 시절엔 가능했어요. 화산초등학교 때 체육을 좋아하고 좀 잘하다보니 학교대표로 군 대회 같은 델 나갔는데 부모님들은 반대를 많이 했죠. 졸업하면서 광주중앙여중에 체육특기로 진학을 하려했는데 키 문제로 퇴짜를 받았어요. 학교에서 나오다 우연히 광주여상에 계시는 노정현 선생님을 만났는데 이야기를 듣더니 동성여중에 추천을 해주신 거예요.
노정현 선생님의 지도로 광주여상에 진학을 하고 고1때 청소년대표로, 고3때 국가대표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그 때 노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웃음)
박미희 선수를 알아 본 노정현 선생님이 누구신지 새삼 고맙군요. 1983년부터 시작된 실업배구단 시절은 어땠습니까?
제가 입단한 미도파는 80년대 여자 배구코트를 점령한 배구 명문이었어요. 조혜정언니를 비롯해 유경화, 유정혜 등 1세대에 이어 김화복으로 대표되는 2세대, 곽선옥의 3세대, 4세대의 '명세터' 이운임이 있었고 저는 사실상 미도파 시대의 마지막이었다고 봐야죠. IMF직전 미도파가 해체됐으니까요.
현역시절 수많은 남성 팬들을 몰고 다니던 박미희선수가 생각납니다. 요즘 같으면 얼짱에 속한다고 할까요. 대단한 미인이시고 더 뛸 수 있었던 시기에 은퇴한 것 같은데요. 미도파의 해체로 은퇴하셨나요?
연보
1963년 전남 해남군 화산면 출신 해남 화산초등학교 졸업 광주 동성여중, 광주여상 졸업 한양대 체육학과 졸, 한양대 체육대학원 석사
경력
1980~1983 아시아청소년배구선수권대회 우승 한·일 교류배구대회 출전 세계청소년대회 우승 (체육훈장 기린 장) 1983~1991 미도파배구단 입단 - 대통령배·실업연맹·박계조배·종별선수권 전국체전 등 출전 다수 우승 대회 MVP·베스트상·인기상·공격상·수비상·신인상 등 수상 1984~1987 서울 국제배구대회·일본 NHK배 국제대회 출전 1985~1987 국제배구연맹컵대회·국가대표 디나모 국제대회(독일·네덜란드) 출전 1984~1988 미국 LA올림픽 5위 서울올림픽 여자선수단 주장 러시아초청 국제배구대회 출전 1980~1990 국제배구연맹 역대최고선수 100인 선정 1991 뉴델리아시안게임 3위, 북경아시안게임 2위 1992~1995 북경, 페루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미도파배구단 은퇴, 생활체육지도자 배구국가대표 경기분석 위원 대한배구협회 강화분과위원 (국가대표-청소년대표 선발위원) 1995~2010 대한배구협회 강화분과위원 2003~2006 9인제 배구연맹 국제이사. 서울시배구협회이사 2007~2010 중국 연변과학기술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대한체육회 스포츠외교전문가 과정 1기 수료 (경기대학교) 현 KBS N 배구해설위원(V-리그 및 국내외대회, 비치발리볼 해설) 서울시립대, 성신여대 강의 | |
1983년 미도파에 입단해 팀의 전성기에 활동하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끝으로 28세 때 결혼하면서 은퇴했어요. 요즘엔 주부선수들도 더러 있긴 하는데 당시엔 결혼을 하면 당연히 그만 두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니까요.
그러나 한 번도 배구를 그만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9년간의 실업선수 생활을 끝으로 서울시립대와 기독대, 수원 장안대 등에서 실기 강의를 펼치며 배구와의 인연을 이어나갔지요.
다행히 현역시절 공부를 한 덕에 은퇴 후 대학에서 후배들을 지도했고 더 욕심이 생겨 중국에 3년 동안 배구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박미희 위원님의 이력엔 국내최초가 여러 개 있는데 실업시절 대학을 간 여성배구 선수 1호, 그리고 배구유학에다 여성해설위원 1호 등이 있지요? 또 대한배구협회의 경기기술강화위원으로도 계시는데 그건 무슨 일을 하는 것인가요?
협회의 기술강화위원은 남자와 여자배구가 각각 나뉘어져 있는데 국가대표선수를 비롯해서 감독을 선임하고 주니어 유스대표들과 감독들을 선발하는 자리예요. 국내최초를 여러 개 달고 보니 항상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게 있나 봐요. 어깨가 무겁죠.
배구해설위원은 어떻게 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배구해설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엔 주로 비치발리볼을 중계했죠. 저를 TV해설가로 추천한 사람은 이세호 강남대 교수세요.
여자프로배구단이 생기고 TV에서 프로 전 경기를 중계하면서 2006년부터 계속 투입이 됐어요. 아직도 사투리가 남아있고 경기해설은 타이밍이 중요하다보니 많이 어렵지만 그냥 편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박미희 해설위원은 "별명만큼이나 해설에도 여우다운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같은 말이라도 맛깔나게 전달할 수 있는 말주변과 순발력도 갖췄다"고요.
잘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원래 성격은 내성적이었는데 선수생활과 방송활동을 하면서 외향적으로 변했다고 주변에서도 많이 놀라더라고요.
경기해설을 하면서 선수시절처럼 인기를 얻은 비결이 무엇입니까?
인기라니 부끄럽습니다. 아무래도 실전경험이 많다보니 다양한 애드리브를 구사할 수 있고요,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경기흐름에 대응하기가 어렵죠.
여자배구가 이번에 은메달이라는 값진 결과를 얻었는데 우리 배구가 발전을 하고 다음 국제대회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저는 후배 선수들에게 너무 지도자들에게만 의지하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어요. 좋은 선수가 되려면 주는 밥만 잘 먹어선 안 되는 거거든요. 지도자 분들이 가르쳐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다른 선수들보다 더 잘하는 선수로 거듭나려면 생각하는 배구에 익숙해져야 해요 스스로 생각하는 플레이를 해야지만 진정으로 뛰어난 선수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지도자들은 어린 선수들에게 체력단련과 함께 배구가 즐거운 것이라는 것을 심어주고 기술은 더 나중에, 고등학교 때 가르쳐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골프나 수영처럼 고향 해남에 박미희 배구학교나 기념사업을 할 생각은 없는지요?
그건 더 나중에……. 우선은 '현장 감각을 갖춘 여성 지도자가 필요한 때'이니만큼 방송활동을 하면서 더 늦기 전에 가능하면 프로팀을 맡아 지도를 해보고도 싶어요. 호호.
박위원님의 배구지도자로서의 꿈이 더 크게 펼쳐지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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