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40여 년 동안 다도와 함께 한 해남읍 출신 정학래 선생. '차는 현대문명이 가져온 불치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명약이 될 수 있다' 며 꼭 차를 마실 것을 권한다. '사랑니' 영화를 감독한 정지우 영화감독이 그의 아들이다. |
|
| 차인이 아니라도 해남하면 대흥사, 대흥사하면 초의선사가 먼저 떠오른다. 신라 때부터 오랜 전통을 이어 오던 우리나라의 다도는 조선 후기 대흥사의 초의선사에 이르러 다시 꽃피기 시작하였다. 초의선사는 대흥사 일지암에서 '동다송(東茶頌)'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를 저술하고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과 교우하며 한국의 다도를 중흥시킨 인물이다.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일컫는다. 해마다 초의선사를 기리는 차 문화제를 열고, 차인대회가 해남에서 열리지만 그러나 어쩐 일인지 해남이 차의 종주지로서의 위상을 갖지는 못한 것 같다. 차밭하면 보성차밭이고 야생차는 하동이 먼저 떠오르며, 티백차생산은 제주도에서 먼저 치고 나갔으니 실속 있는 것은 다 타 지역에 내준 셈이 되어버렸다. 무슨 까닭일까? 갑작스레 기온이 내려 따뜻한 차 한 잔이 더욱 생각나는 날, 해남출신 원로 차 연구가 정학래선생(80)을 찾아뵙기로 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이란 곳에서 차와 명상수련을 하며 살고 있는 곳, 일우제(一羽齊)라고 한다. 자신의 호 일우(一羽)에서 따 왔다는 조촐한 농장에서 해남과 차와 그리고 초의선사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일우(一羽)라는 호는 날개라는 뜻인 것 같은데 어떤 의미로 지은 것인지요? 한창 차 운동을 하던 시기에 만난 전각의 대가 청사 안강석선생께서 지어주신 거예요. 중국 당나라 때 다경(茶經)을 쓴 육우(陸羽)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우(羽)자를 따 지은 거지요. 육우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용개사 스님인 적공(積公)대사에 의해 길러졌다고 해요. 적공대사는 차를 무척 좋아하여 육우가 어렸을 때부터 차 끓이는 법을 가르쳤는데 나중에 이것을 편집해 묶은 게 다학전문서로 다경의 초고가 된 거죠. 오늘날 차에 관한 많은 이론들은 이 다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저도 차 연구가로 한평생을 살고자하는 염원에서 이 호를 받았지요. 그렇군요. 동다송은 이를테면 중국의 다경과 같은 책인가요? 차 이야기를 꺼낼 때 초의선사와 동다송을 빼놓을 수 없지요. 중국에 육우의 '다경'이 있으면 한국에는 '동다송'이 있다고 말합니다. 동다송은 곧 '한국의 다경'이라고 할 수 있는 '차의 전문서'죠. 초의선사는 원래 해남출신은 아니고 정조10년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나 순조·헌종·철종·고종 3년(81세 입적)에 이르기까지 해남 대흥사에서 승려로서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아암 혜장, 자하 신위 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교유했습니다. 저서로 '일지암시고', '일지암문집', '초의선과', '선문사변만어', '동다송', '다신전' 등이 있지요.
|
|
연보
1930년 전남 해남읍 수성리 출생 해남 동초등학교 졸업 6년제 해남중학교 2회 졸업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3년 중퇴, 도일 일본대학교 정경학부 졸업 1960년대 초 의제 허백련(毅齋 許百鍊)선생을 만나면서 차 세계에 입문 1976년 「법륜지」에 '초의선사의 차' 발표 1979년 식물학자 이덕봉씨, 박종한, 김미희 씨 등과 함께 한국차인회 창립 주역 1980년 1월 한국차인회 상임이사 부임, 첫 사업으로 일지암 복원추진 등 차 문화 보급에 앞장 1980년 「분재 수석」에 '한국의 차를 말한다' 발표 1983년 「정원학회지」에 '한국의 다도' 발표 「월간 다원」 창간호에 '일본의 차 정신' 등 발표 1990년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에 1000여평의 자연농원 개발 귀농 후 대체의학, 자연식 연구, 다도, 요가, 단식, 명상수행 생활 현재 명원문화재단 고문
수상
2006 제11회 명원차문화대상 학술상 수상 2009 제18회 초의문화제 초의상 수상 | |
선사의 저서 중 다신전과 동다송이 가장 유명한데 내용에 무슨 차이가 있나요? 다신전(茶神傳)은 차 생활에 필요한 지침서로서 찻잎 따기, 차 만들기, 차의 보관, 물 끓이는 법, 차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차의 색깔, 향기 등 20여 가지 목차로 상세하게 다룬 책이지요. 나이 43세(1828년) 여름, 지리산 칠불선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중국의 '만보전서(萬寶全書)'라는 백과사전 속에 수록되어 있는 '채다론(採茶論)'의 원문을 초출(抄出)했는데 2년 뒤인 경인년 봄에 사원에서 차를 알고자 하는 이가 많아 책명을 '다신전'이라 하고 한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동다송'은 52세(1837년) 되던 해 봄, 다도를 묻는 해거도인 홍현주(정조임금의 사위)에게 저술해 보낸 내용으로 '우리나라 차를 찬송'하는 492자의 칠언시로 쓴 다서(茶書)라고 할 수 있지요. 선생님은 우리나라 차 연구와 차문화운동의 1세대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일찍이 차의 세계에 입문하시게 되셨습니까?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일본의 통치와 전쟁을 겪으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급박해 한가롭게 차를 즐길 여유가 없어졌다고 봐야죠. 더군다나 일본사람들이 차를 즐기니까 '차'하면 일본문화라고 여겨 백안시하는 풍조였고요. 해방 후엔 차 마시는 사람이 없어서 일본사람들이 조성해놓고 떠난 차밭이 70년대 말까지 황폐된 체 버려져 있었어요. 60년대 초 어느 날 의제 허백련선생을 뵈러 갔어요. 차를 한잔 앞에 놓고 그림얘기보다 차 예찬을 많이 하시더군요. 크게 흥미를 느껴 그 때부터 자료를 모으고 차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차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차 문화 운동을 일구던 당시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주시죠. 저는 원래 약학을 전공했다가 진로를 바꿔 일본에 가서 정경대학을 다녔는데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민예론에 심취해 있었어요. 그의 미학적 다도 철학에 빠져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을 정도였지요. 그 시절 대흥사의 일대 강사였던 정학천 스님을 찾아 차의 이론을 들을 수 있었고 고향에서 김봉호 선생 등 선배 차인들과 교유하면서 차 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 미술사학자 김호연씨를 만나 '분재 수석'이란 잡지에 3회에 걸쳐 '차란 무엇인가'를 기고하면서 본격적으로 차의 정신에 빠져들었지요. 초의선사가 계시던 대흥사와 일지암이 있는 해남이 고향이라는 점도 차와 인연을 맺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겠군요. 당시에 선생님이 펼친 차 이론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차란 평화스러운 것입니다. 다산, 추사, 초의의 어울림을 보십시오. 당시 신분계층이 엄했던 시절에 차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극대화시켜 주는 매개체로 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지요. 다산은 가톨릭과 실학의 학자요, 추사는 유학자, 초의는 승려인데 한 잔의 차는 이 세 사람의 종교적인 울타리까지 무용지물로 만드는 구심점이었습니다. 일본은 다도라고 해서 차를 만들고 마시는 일이 엄격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다도, 즉 차의 정신이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중국에서 시작된 차는 처음에 약용으로 사용되었을 만큼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는 보건음료로서 효과가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차는 사람들이 건전한 삶의 길을 걷는데 있어 가장 소중한, 몸을 튼튼히 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기호음료지요. 뿐만 아니라 차를 끓이고 마시며 대접하는데 있어 따르는 정성과 예의범절 및 청정하고 고요로운 분위기 등에서 각성의 생활을 체득(體得)하게 됩니다. 대흥사의 초의선사가 김명희에게 보낸 다시(茶詩)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어요. '예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어서라네' (古來聖賢俱愛茶 茶如君子性無邪) 이런 의미에서 다도란 차생 활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이지 차생활의 예절이나 법도 그리고 차를 끓이는 행다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현재 각 지자체들이 차를 테마로 다양한 문화행사들을 펼치고 해남에서도 초의선사 입적일을 전후로 차 문화제 열리는데 개선할 점이나 불만은 없으십니까? 차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불만은 없습니다. 80년대 초까지 한국차인회 상임이사로 일선에 있을 때 우리차를 보급하기 위해 어깨띠를 메고 거리에 나가기도 하고 사무실을 활성화해 보려고 서화전시회를 열어 기금모금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지자체들이 나서서 행사를 추진해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요.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는 초창기의 그 때에 비해 너무 상업적으로 흐른 감이 있습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선(禪)과 같다'하여 선다일여(禪茶一如), 혹은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하는데 명예욕으로 행사를 끌어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근래에 명원차문화재단 학술상과 지난해 초의대상을 받으셨는데 사실 너무 늦은 감이 있었지요? 아닙니다. 저기 윗목에 살아계실 때 자주 만나 뵙던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께서 직접 써준 다시(茶詩)가 있네요. '차 한 잔은 목과 입을 축여주고/ 두 잔을 마시면 외롭지 않고/ 석 잔째엔 가슴이 열리고/ 넉 잔은 가벼운 땀이나 기분이 상쾌해지며/ 다섯 잔은 정신이 맑아지고/ 여섯 잔은 신선과 통하며/ 일곱 잔엔 옆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나온다.' 차인은 모름지기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선의 경지에 있어야하는데 나는 아직 어림도 없지요. 이 경지를 생각하며 오늘도 차를 마십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여기 경기도 말고 귀향해서 고향 해남에서 차밭을 일구고 차 문화 발전을 위해 마지막 열정을 다해 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