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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돌 맞은 해남읍場

희망의 시작 땅끝해남 2008. 11. 5. 07:19

77돌 맞은 해남읍場
1932년 문 연 읍장 희수 맞다
2008년 10월 31일 (금) 15:11:37 박영자 기자 hpakhan@hnews.co.kr

   
 
 

사진 위 : 고도리로 이전 하기전 해남읍장은 천변교와 유신교 사이 천변가에 자리했다.

사진아래 : 고도리로 옮겨 온 해남읍장은 77년간 변함없이 오늘도 주민들과 희노애락을 같이하고 있다.

 
 
남동 주민 아우성으로 현재 터 이전
공사비 3040원 들여 일본인이 공사

일제시대 해남읍 남동과 고도리 주민들 사이에서 원성이 일기 시작했다. 해남천에서 채소도 씻고 빨래도 해야 하는데 해남천 물이 오염돼 가니 아우성이 일만도 했다.

오염의 원인은 해남 천변교와 유신교 사이에 있던 5일장 때문이었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각종 쓰레기며 동물의 분뇨가 물에 섞여 천으로 흘러 내리니 5일장을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자연스럽게 일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의 원성이 일자 일제 당국은 이를 검토하게 되고 해남면협의회도 이 안건으로 회의를 열게 된다.

1931년 해남면협의회는 천변교 인근에 있던 5일장은, 해남천 상류에 있는데다 장소도 협소해 고도리로 옮길 것을 최종 결정하기에 이른다.

현재 위치인 고도리로 5일장을 옮기기로 결정이 되자 당국은 고도리에 3300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총 공사비 3040여원(당시 화폐기준)을 들여 일본인 등화조(藤花組)에게 공사를 맡긴다.   

당시 상황을 1932년 3월 22일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고도리에 들어선 신시장에는 총점포가 281개소로 음식점이 38개소, 수육판매소가 3개, 기타는 잡화와 어물점으로 공동점호 시설과 공동변소까지 완비한 중앙시장으로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때 공사는 준공일자를 지키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지연되다 낙성식도 하지 못한 것으로 동아일보는 전하고 있다. 

이 보도 그대로 1932년 어느 때인가 고도리로 옮겨온 5일장은 올해로 77돌을 맞았다. 그때 그 위치에서 조금씩 확장을 거듭했을 뿐 중심지만은 그대로 고수해 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변화도 있었다. 1932년부터 1980년대까지 지금의 삼우아파트 내에 있었던 우시장이 읍 용정리로 빠져나간 변화가 그것이다.   

   
 
  77주년 기념 해남읍 장터축제가 지난 24일 고도리 5일장 특설무대에서 열렸다.  
 
현재의 고도리로 옮기기 전의 5일장은 어디에 있었을까. 당시의 5일장은 지금의 천변교와 유신교 사이에 들어서 있었는데 이때의 5일장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장이었다. 당시 5일장이 모두 그랬듯 이곳에도 하나 둘 모여든 상인들로 시장이 형성되었고 시장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자 우시장도 선술집도 들어섰다.  

임상영(73·읍 중앙리)씨는 당시 천변교 인근 5일장 주변은 밭둑이었고 백성사 세탁소 옆 골목에서 옛 중앙병원 사이에 허술한 선술집들이 들어서 있었다고 말했다.

임씨는 또 소도읍 공사를 하지 않았는데도 지금 천변교에서 매일시장으로 이르는 천변가 길목이 넓은 것은 이곳이 5일장 터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5일장이 고도리로 옮겨오자 시장부근으로 상가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고도리는 꽤 큰 저잣거리로 변모한다.

또 고도리는 5일장으로 해남 문화의 중심지, 여론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해남장이 들어선 날이면 송지 북평 그리고 완도 강진 사람들도 걸어서 걸어서 고도리로 모여들었다. 집에서 기르던 짐승을 메고 끌고 오는 사람, 곡식을 등에 짊어지고 머리에 이고 오는 사람들로 시장은 가득 찼고 해남읍장에 가기 위해 금강재와 대흥사 띠재, 오시미재, 오심재 등 각 고개에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로 기다란 줄이 형성됐다. 당시 5일장의 단연 인기는 술집과 약장수, 사주쟁이였다.

해남교 옆에 있던 술도가니 집에서 얼큰하게 막걸리를 걸친 사람들의 휘청거리는 모습은 장날의 흔한 풍경이었고 북을 두드리며 약을 파는 약장수 주변은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나의 점괘는 보지 않더라도 남의 점괘를 보기 위한 사람들로 사주쟁이 주변도 사람들로 넘쳐났고 길거리에 좌판을 벌이고 일수놀이 하던 사람들도 흔한 때였다.

당시 5일장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친정집 소식도 5일장에서 들었고 누가 죽었고 누구네가 자식을 여웠는지도 모두 5일장에서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과 소통역할을 했던 5일장을 이유 없이 찾곤 했다.

당시 5일장의 주 품목은 농축산물과 해산물이었다. 농축산물은 집에서 기르던 것이 주였고 해산물은 고천암과 북일 등지에서 공급됐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해남 5일장의 모습도 많은 변화를 맞았다. 농수산물 위주에서 공산품 비중이 커졌고 취급물량도 소량에서 대량으로 바뀌었다. 또 지역에서 생산되는 품목보다 목포와 대도시에서 공급되는 양의 비중이 월등히 높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해남읍 인근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집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을 해남 5일장에 내다 팔고 있다. 삼산과 읍 인근 농촌마을은 지금도 집에서 소량으로 재배한 농산물을 5일장에서 소비하고 있고 북일 바닷가에서 잡힌 낙지와 굴, 쭈꾸미 등은 5일장의 인기품목으로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