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신문/해남을빛낸사람들

송희성(전 전남도의원)

희망의 시작 땅끝해남 2011. 10. 13. 12:18

송희성(전 전남도의원)
봉사와 여성권익운동 한평생
2011년 07월 29일 (금) 11:50:46 해남신문 hnews@hnews.co.kr
   
 
  지금은 한국여성지도자 연합회 광주.전남 회장뿐 아니라 우리민족 음식문화보존과 우리겨레 하나되기 운동 등 통일을 대비한 남북여성조직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는 송희성 전 도의원. "너무 바빠서 나이를 먹을 시간도 없다"고 말한다.  
 

전남도의원을 역임한 해남읍출신 송희성씨(여·74)는 해남고려병원창립자이자 해남초대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독립운동 유공자 송봉해씨의 딸이다. 정치를 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화여대 재학시절 전국 최초로 대학생 농촌계몽대를 조직해 활동했고 강원도 삼척 탄광지역, 농촌의료봉사, 야학 운영 등을 하며 어려운 이웃과 함께한 경력이 있다. 5·18 광주 민중항쟁 시에는 남편 노희관 교수(전남대)와 함께 유일한 부부구속자로 고통을 받기도 했다.

"5·18당시 여성들은 물 심부름 밥 심부름 등 남성들의 조력자로서만 기록되고 있는데 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미 여성들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컸었고 5·18현장에서 주체적으로 참여를 했지요."

이후 송희성씨는 (사)대한여학사협회 광주지부 회장, (사)한국여성유권자 광주연맹 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중앙상임위원 및 광주서구협의회장을 하며 적극적으로 여성운동을 펼쳤고 이 연장선상에서 전남도의원으로 뽑혀 정계에 진출, 여성특위위원장, 호남여성의원 협의회 회장을 하고 2001년에는 남북여성 하나 되기 평양회의에 남한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해남이 낳은 걸출한 여성정치인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송희성 전 의원을 만나 고향 해남과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나누었다.




안녕하십니까? 75세라는 연세를 느끼지 못할 여전한 아름다움을 갖고 계시는군요. 서울 출장을 다녀오시는 길이라고 하셨죠?
네. 한국여성지도자 연합회 광주·전남회장으로서 서울에 출장을 자주 갑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침 영국에서 돌아와 대전에 살림을 차린 아들집에 들렀다 오는 길이지요.

제가 송희성 선생님을 처음 뵙던 때가 생각나는군요. 참 단아한 미인이셨는데 지금도 그때와 별 다름이 없습니다. 무슨 비결이 있습니까?
모두들 그런 말을 하는데 난 사실 너무 바빠서 화장도 제대로 할 시간이 없어요. 타고난 체질에 구태여 말한다면 늙을 시간이 없다고 할까요? 대체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매우 바쁘게 산다는 것이에요. 정신의 활력이 육체에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라 할까요?

 연보
● 1937년 해남읍 남동리 출생
● 해남읍 동초등학교, 해남중학교, 광주수피아여고 졸업
●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 국어군문학과 졸업
● 이화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교육학 석사)
● 조선대학교정책대학원 지방자치학과 졸업(행정학 석사)
● 호남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졸업(법학박사-헌법전공)

 경력
● 1972.  정신여자중학교, 해남 옥천중학교 교사
● 1972.12~1974.12  광주 숙문여고(현재 송원 여고)교감
● 1974~1984  광주 YWCA이사 및 임원
  5·18 광주 민중항쟁시 연행 구속(유일한 부부구속자)
● 1986.5~1989.5  (사)대한여학사협회 광주지부 회장
● 1989.10~1995.10  (사)한국여성유권자 광주 연맹 회장
● 1990~2003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중앙상임위원 및 광주서구협의회장
● 1994~1997  5.18 기념재단 이사
● 1995.6~1998.4  전라남도 도의회 의원 및 여성특위 위원장
● 1997~1999  호남여성의원 협의회 회장
● 2000.3~2002.3  전라도 전통음식 보존연구회 창립 회장
● 2000.12~2005  새 정치 여성연대 중앙회 이사 및 전남 회장
● 2001.10~2004.2  조선대학교 및 호남대학교 겸임교수
● 2001.2  남북여성 하나 되기 평양회의 남한대표 참석
● 1999.10~ 현재  (사)한국여성지도자 연합회 광주. 전남 회장
● 2001.5~ 현재  (사)우리민족 음식문화 보존협의회 중앙회창립 회장
● 2005.8~ 현재  (사)우리겨레 하나되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상임대표
● 2006. 1 ~ 현재 광주사랑어머니 한부모가정돕기이사장

 수상
● 1992.12.31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
 (제 6050호 대통령-총무처)
● 1992.5.16  청소년 지도보호육성 공로 표창장
 (체육청소년부 장관상)
● 1992.10.16  국가사회발전기여 공로 표창장 수상
 (대통령상)
● 1996.3.18  여성정치참여기회 확대추친 공로상 수상
 (여성단체협의회상)
● 1999.6.10  여성정치 발전인상 수상
 (한국여성유권자연맹상)
● 1999.8.15  정부추진 국정 개혁공로 표창장 수상
 (김대중 대통령상)
● 2002.8~ 현재  광주 민주유공자
 (국가보훈처)
● 2006.11.8  최초 여성 의병장 애국열사 윤희순상 수상
 (춘천시장)

 저서 및 논문
● 1995.  <통일로 가는 길>
● 1997.  수필집-공저 <꿀맛, 맹물맛, 땡감맛>
● 1998.  <위기와 시련을 넘어 21세기 열린 미래를 향하여>
● 2000.  <대통령과 함께한 사람들4>
● 2002.  <여성과 사회, 정치>(조선출판부)
● 1989.6  논문 <지방의회의 정책결정 능력향상 방안에 관한 연구>
● 2000.12  논문 <헌법상 정당제도에 관한 연구>


당시 60년대에 시골에서 이화여대를 간다는 것은 대단한 화제였을 텐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십시오.
정확히 말하면 1956년 3월이에요. 6·25전쟁 후라서 모두들 어렵고 배고플 때인데 병원의사셨던 아버님 때문에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죠. 더구나 위로 오빠가 한분 계셨는데 중학교 때 사망한 터라 무남독녀였어요. 마음껏 멋을 내고 즐겁게 살수도 있었는데 학창시절 4년간 줄 곳 농촌봉사활동만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강원도 일대 화전민과 벽촌, 농어민을 찾아가 야학과 밭매기 등 봉사를 하는 틈틈이 문맹퇴치, 야학도 하고, 생활개선에 주력을 했죠. 그 때는 더 배운 사람들이 베풀어야한다는 사회봉사활동이 일종의 의무감처럼 있었어요.

이력을 보면 초창기 계몽운동, 봉사활동에서 여성단체 활동을 하시다 정치인이 되셨죠? 일반적인 여성들의 각성과 의식화에 따른 자연스런 진로선택인데 가장 보람 있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아무래도 대학시절부터 꿈꾸어오던 여성지위향상과 복지증진을 위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던 정치인 시절이 아닌가 싶어요. 95년도 지방선거에서 전남도의원으로 당선돼 문교사회 내무위원으로 활약하며 여성특별위원장이 됐지요. 우선적으로 30억원의 여성발전기금을 조성하는 바탕을 만들었고 농어촌여성의 위생과 건강, 농촌아동을 위한 유아교육기관 설치, 사회 각 분야별 여성인력 30%등용운동 및 정책건의, 각 시군 여성봉사대에 예산할당, 여성노동자의 처우개선, 농어촌 농번기탁아소설치 등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을 돕는 정책들을 입안해낼 때가 제일 기뻤습니다.

지금 하시고 계시는 일, 우리민족음식문화보존협의회와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입니까?
저는 의원시절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농촌여성들을 위해 골다공증 및 부인암 검사설비를 간춘 의료서비스 차량을 마련, 순회검진하게 하는 등 구체적이면서도 피부에 와 닿게 여성의 시각에서 정책들을 개발하고 현실화하고자 애썼습니다. 우리민족음식문화보존협의회를 꾸린 것은 전적으로 농촌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한 것으로 의원활동을 끝내고 곧바로 시작한 일이지요. 그 때 시작한 일이 지금 자연스럽게 열매를 거두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고장에서 나온 특산물을 이용해 음식개발을 하는 게 유행이고 그걸 통해 여성들이 크게 경제자립을 다 하더라고요.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도 이데올로기를 떠나 원초적인 입맛이라는 공통정서를 기반으로 남북통일을 대비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민주화운동, 정치운동에서 자연스럽게 통일운동으로 이어진 셈이군요. 이렇게 평생을 개인의 안온한 삶에 머물지 않고 사회운동에 힘을 기울여 오신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지난해에는 광주시 여성단체협의회가 주는 무등여성대상을 받으셨죠?
부끄럽습니다. 평생 봉사하며 살라는 명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라고 하지만 유엔개발계획에서 발표한 성별권한지수를 보면 109개국 중 61위로 아직도 형편없이 낮지요. 우리여성들의 교육수준이나 능력은 전 세계가 놀랄 만큼 높은데 정치, 경제, 사회참여현실은 그에 따르지 못해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어요.

만약 다시 도의원을 하신다면 해남을 어떻게 돕고 싶습니까?
저는 대학 졸업 후 바로 고향 해남에 내려와 삼애농민복음학원교사, 사감을 했고 유달영 박사와 함께 농민운동을 한 경험, 그리고 재건국민운동해남군부녀실장을 하기도 해서 해남은 지금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시 그 일이 주어진다면 여전히 해남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도 여성들을 위한 일을 할 것입니다. 도의원시절 관심 있게 지원했던 해남여성회관 운영이라든지, 우항리 공룡테마파크 조성, 우수영명량대첩지 성역화사업들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도 살펴야죠. 호호.

이화여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시고 한때는 수필도 쓰셨는데 여렸을 적 꿈이 문학인이었습니까?
난 사실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평소에 왕진을 늘 다니시던 부친은 여자의사는 너무 힘들다고 절대 반대셨죠. 해남동국민학교시절부터 웅변이나 그림, 글쓰기에 소질이 있었고 수피아여고시절에도 문예부장을 했는데 당시 이수복 시인이 담임이셨어요. 어느 날 집에 오셔서 '희성이는 국문과로 가야한다' 고 서정주 시인께 소개장까지 서주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진로가 정해졌지요. 59년도인가 전국대학생즉흥시경연대회에서 입상해 정식 시인으로 데뷔하기도 했는데 당시 여류문인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실망을 해서인지 문학 활동을 열심히 못했어요. 그냥 가벼운 수필만 쓰는 정도지요.

해남은 수필이나 시의 소재가 무궁무진한데 하나만 고른다면.
학이요. 목을 길게 빼고 고고한 학이 나는 너무 좋았어요. 어느 해인가 해남향우지에 '학의 노래'라는 글을 쓴 적도 있는데 학은 해남의 분위기와도 참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또 부엉이, 밤에만 날아다닌다는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도 좋아합니다. 해남에 '한듬문학동인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게 사실은 우리 집에서 발족모임을 가졌답니다. 아련한 옛이야기네요.

<김원자 편집고문·언론인·호남대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