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해남신문이 태동한지 21년이 지나며 어느덧 지령 1000호를 맞았다. 21년의 세월동안 지역주민들의 눈과 귀로써 지방자치를 선도해온 해남신문이 주민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한편 해남을 대표하는 지역언론으로서의 기반을 더욱 튼튼히 다지고 한걸음 더 도약하고자 한다. 이에 21년 전 해남신문 창간을 주도했던 창간추진위원을 초청, '창간정신'을 되새기는 간담회를 지난 2일 해남신문사 회의실에서 가졌다. 이날 창간추진위원들은 해남신문이 군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바른 언론으로 거듭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편집권 독립과 직필정론(直筆正論) '창간정신'을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 시 : 2011년 3월 2일 장 소 : 해남신문 회의실 참 석 : 창간추진위원장 김창섭 , 노 광, 김옥수, 윤주열, 이광교, 오창선, 이 웅
김창섭 = 21년 전 창간당시에 지방화시대가 되면서 불가결적으로 해남지역에 민주언론의 필요성이 제기됐었다. 당시 전국의 언론들이 재 역할을 못하고 부패한 언론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어 해남지역에서 제대로 된 언론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에 군민들의 공감대가 있었다. 또한 지방자치 바람이 불던 때로 지방화시대가 되면 필수불가결하게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당시 해남지역 사회운동을 이끌던 해남YMCA가 주축이 돼 창간준비에 들어갔다. 창간에 있어 군민들의 바른 목소리를 전할 수 있도록 편집권 독립에 중점을 뒀으며 비용은 군민주 모집방식으로 진행됐다.
오창선 = 해남신문은 20여년 전 당시 일부 군의원들이 정치권력을 개인 사익을 챙기는데 사용하는 등의 부패를 막고 정치권, 행정에 대한 감시?견제와 함께 지역의 따뜻한 사람과 이야기를 모아 공유하자는 창간정신을 지녔었다. 창간 형식은 한겨레신문을 벤치마킹해 군민주로 자본금을 모아갔다.
이광교 = 해남신문이 창간하기 전에는 언론에 난 이야기는 거짓말이고 유언비어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던 시대로 언론이 언론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수세싸움, 농민권익신장, 중등교육문제 등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해남지역은 군민들의 바른 정신이 형성돼 있었으며 이는 해남신문이 창간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 됐다. 해남신문 창간 과정을 잠깐 설명하자면 지난 1989년 9~10월 각계각층의 33인의 창간준비추진위 모임이 시작돼 김창섭 추진위원장을 선출했다. 또한 이광교 사무국장, 김갑술 조직국장, 박상일 편집국장 등을 중심으로 매일 새벽 6시 해남YMCA에 모여 창간준비를 위하 회의를 진행했다. 이후 창간준비호(1~5호)를 발간하고 4월에는 420여명의 발기인을 초청해 발기인 대회를 갖고 1990년 6월 22일 드디어 제1호 해남신문이 발간됐다. 5만원 이상 발전기금을 기탁해 준 군민들에게는 구리로 만든 패를 나눠준 기억이 새롭다. 이후 해남신문이 해남의 사회운동을 이끌며 해남 지방자치발전에 기여했다는 자부심도 있다.
김창섭 = 창간을 준비하던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군민들을 대상으로 발전기금을 모금했는데 되돌려 받는다고 보장할 수 없음에도 500여명의 군민들이 출자를 해줬다. 이는 바른언론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노광 = 창간을 준비하던 당시에는 나락장사들이 농민들의 돈을 떼어먹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창간추진위원들을 믿고 군민들이 당시에 큰돈이던 5만원을 십시일반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해남신문이 지역을 올바르게 이끌어 달라는 지역을 위한 투자의 의미였었다.
김옥수 = 해남신문이 만들어지고 현재 전국 최고의 지역주간지라는 명예를 얻고 있는 데에는 해남군민이 핵심이다. 또한 해남신문 창간 당시 타지역보다 앞서 농민운동 등이 진행됐던 시대분위기로 농민들도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의식과 사회참여에 대한 기대 등의 사회분위기도 있었다. '사람 중심의 사회,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데 올바른 여론이 형성돼야 한다는데 많은 군민들이 공감해 줬었다. 하지만 당시 어려운 상황에도 출자를 해줬음에도 현재 주주로 등록이 안된 군민들도 일부 있다. 이들은 해남신문에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며 정당한 권리기 때문에 주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광교 = 77년에는 해남YMCA에 농민회가 결성되고 81년 선거에서는 해남과 제주만이 민정당 국회의원을 떨어뜨리는 사건이 있었으며 84년 민주화운동, 수세싸움 등의 사회운동의 연장선상에 해남신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창간 이후 해남신문은 군민들이 보고, 호응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노광 = 1995년 당시 지역주간지는 정치기사를 게재하지 못했는데 해남신문은 지역의 올바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정치기사를 게재했었다. 하지만 그 결과 2개월간 발행정지를 받기도 했다. 이때 지역의 목소리를 지역신문이 내야함에도 그러지 못했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홍성신문 등 타지역 지역주간지들과 바른지역언론연대를 결성, 정부와 투쟁해 지역주간지도 정치기사를 게재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꿔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도록 한 성과도 거뒀다.
윤주열 = 해남신문이 '창간정신'을 바탕으로 21년간 지역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군정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앞으로도 창간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더욱 노력을 기우려야 할 것이다. 특히 편집권 독립을 위해서는 현재 군민주로서의 신문이 고액투자자에게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이를 막아야 하며 창간정신을 지켜나가야 한다.
노광 = 창간 이후 편집권 독립이라는 창간정신을 지키기 위해 평가회를 갖는 등 창간정신을 이어가려는 많은 노력을 기우려 왔었다.
이광교 = 편집권 독립이 편집국의 독선으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 기사는 항상 상호 이해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지역주민에 대한 애정과 공동체라는 기본바탕에서 접근해 공정한 취재로 균형을 잡아가야 한다. 한쪽의 목소리만 듣고 자칫 기사화 될 경우 다른 한쪽이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김옥수 = 신문기사는 한번 잘못 나가면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때문에 기자들은 항상 구체적 내용을 공부하며 기사에 접근해야 한다.
오창선 = 해남신문은 균형을 잘 맞춰갔으면 한다. 행정에 대한 견제, 감시를 통한 비판과 대안 제시 등 무거운 기사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따뜻한 이야기, 사람 사는 이야기 등 밝은 내용의 기사를 균형 있게 다뤄줄 필요가 있다. 또한 인터넷이 장악하고 있는 매체환경에서 활자매체가 한계가 올 경우에 대비해 지면 구성시 어르신들을 배려하는 편집과 인터넷에 치중해 활자를 멀리하는 젊은 세대가 신문에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김옥수 = 창간추진위원분들 중 작고하신 분들도 계시는 등 창간 1세대 활동 시기가 끝나가고 있음은 고령화 사회에서 우습지만은 않은 이야기다. 새로운 세대를 끌어들이는 방안과 인터넷발달로 변화하는 시대환경에 순응하며 해남신문 정신을 이어가는 방안이 준비돼야 한다.
김창섭 = 해남신문이 창간된 지 21년이 흐르고 지령 1000호가 발간되면서 독자와 주주들은 신문사가 새롭게 변모하길 기대하고 있다. 지령 1000호 제작 때 앞으로 해남신문의 방향을 제시해 주길 바란다.
이웅 = 해남신문이 창간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가장 큰 울타리는 창간추진위원과 전·현직 임원, 주주들의 힘이다. 창간정신을 계속해 이어가기 위해 전 임·직원이 합심해 나가겠다.
<정리=노영수 기자 5536@h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