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시작 땅끝해남 2010. 10. 29. 10:19

박수룡 화백
골기와 서정 서린 남녘쪽 사람들… 비산비야 내고향
2010년 08월 27일 (금) 14:21:10 김원자(편집고문, 언론인, 호남대객원교수) hnews@hnews.co.kr

해남문예회관을 한번이라도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이색적인 조형작품 한 점을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가로 11m, 세로 9m 크기로 스테인레스와 칠보, 도자기판과 네온으로 표현된 조형물의 제목은 '남녘의 넋'. 마산면 출신 박수룡 화백(57)의 작품이다.
해남의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들이 드나드는 문예회관 벽면에 작품을 전시하는 행운을 안고도 박화백은 "고향에 가면 뭔가 다 채워지지 않는 쓸쓸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두 팔로 고향을 다 안고 싶은데 안겨지지 않아서일까.
"광주비엔날레에 다시 작품을 낸다면 해남의 뻘을 가져다 그대로 채워놓고 싶어요. 우리 것을 그린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2003년 급성 간경화로 의식을 잃고 쓰러져 간이식과 위장절제술 등 대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은 요즘 박화백은 최근에 또 일을 벌였다. 전에 있던 경기도 덕소의 화실 옆에 3층 규모의 새 전시실 겸 작업장을 짓고 있는 것이다. 가지고 간 카메라를 놓고 와 카메라를 찾으러 이튿날 또 한 번, 두 번에 걸쳐 박화백과 그림이야기, 그리고 고향 해남이야기를 나눴다.

   
 
  언뜻 추상적인 것 같지만 골기와 서정으로 형상화시킨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는 박수룡화백. 자세히 보면 그의 그림 속에는 벽화 속 용이나, 토끼, 새와 같은 태고적 이미지와 가장 한국적인 색채가 들어있다.  
 

박수룡 선생님의 작품은 제가 1980년대부터 인상 깊게 보아왔습니다. 전라도출신 선배화가들의 일률적인 화풍을 닮지 않은 독특한 그림을 그리셨지요?

1977년에 대학(조선대 사대 미술교육과)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잠깐 교단에 섰는데 미대 합격을 많이 시켰지요. 그런데 금방 '이게 아니다'는 생각이 들어 교사생활을 접고 이수영, 박광훈 등 화가친구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자주 만난 선배화가들로 배동신, 박항섭, 최영림 화백 등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고장 출신인 배동신선생님은 저한테는 스승이자 친구같은 분인데 "그림을 알고 그려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고, 그림의 밀도와 시대성, 차별성을 강조하셨죠. 그 분들로부터 '자기만의 그림을 그려야한다'고 철저하게 배웠다할까요?

연보

1977 조선대학교 졸업

개인전

1987 신세계미술관, 서울
1988 록갤러리, 서울
1989 인테코화랑, 서울
1990 중앙화랑, 대구
1991 문예진흥원, 서울
1992 선화랑, 서울
1993 남봉미술관, 광주
1995 선화랑, 서울
1997 선화랑, 서울
1999 박영덕화랑, 서울
2001 박영덕화랑, 서울
2003 일민미술관, 서울
2005 광주시립미술과, 광주
2007 박영덕화랑, 서울

수상경력

1987~88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국립현대미술관
1988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국립현대미술관
1994 월간미술세계 작가상

주요작품 소장처

선재미술관, 경주
성곡미술관, 서울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가사문학관, 담양
영덕조각공원, 영덕
단양조각공원, 단양
문예회관, 해남
삼성 홈플러스, 서울

비교적 이른 시기에 중앙화단에 자리를 잡으셨는데 그런 연유가 있었군요. 초기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굴절된 인간상은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습니까?

80년대가 그런 때였습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권력과 금력을 지향해 가는 굴절된 모습을 목격해가면서 환멸감을 느끼고 걸프전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지켜보면서 인권이 무참하게 유린당하고 죽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어떠한 인간상으로 어떻게 그릴 것인가에 많은 고심을 했지요. '5월의 노래' '흔들리는 사람들'등과 같은 연작이 나온 시기입니다.
87·88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연 2회 특선을 한 후 이듬해 국전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해 제1회 개인전을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갖고 인데코미술관초대전을 가졌는데 상을 받는 것은 부담도 되지만 흔들릴 때 지탱해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옛 암각화의 문양이나 글씨들을 소재로 한 것 같기도 하고, 이집트의 벽화를 보는 것도 같은 갈색일색의 시대였죠?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중앙화단의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쇼크를 먹었습니다. '그림이 과연 이런 것인가, 그림에 이론이 있는가' 생각했고 그들의 현란한 평들 앞에 설득을 하려면 '나만의 조형을 만들어 주장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짓눌렀죠. 그 때 나온 것이 갈색 모노톤, 그 촌스러운 색깔인데 저는 그걸 오리지널 촌놈색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우리의 된장국 같은, 두엄이 썩을 때 생기는 색깔로 밀어 붙인거죠.

화면을 입체에 가깝게 매우 두껍게 칠해 독특한 질감을 표현하시는데 어떻게 작업하시나요?

유화물감뿐 아니라 종이나 합성수지, 혼합재료를 써서 찟거나 긁고 파열을 내기도 하는데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동원되는 것이죠. 색과 선만이 아니라 질감까지 함께 주제와 일치시키고 싶어요.

추상도 사실도 아닌 독특한 조형언어를 구사하시는 최초의 동기가 궁금합니다. 어느 때부터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하셨는지요?

아, 지금 생각이 나는데요. 마산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1년에 한차례씩 해남군단위 미술대회가 열렸는데 4학년인 제가 나가게 되었어요. 학교 교정을 그리라니까 모두들 화면 가득하게 교실을 그리는데 나는 그게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반만 뚝 잘라 건물 한 쪽만 그렸죠. 나중에 같이 간 인솔교사가 보시고 "왜 하필 화장실을 그렸냐?" 고 했는데 그게 가작이 돼 노트 18권을 부상으로 받았죠. 남과 같이 그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그 때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전시회 약력을 보면 1999년~2000년에 미국에서 많은 활동을 하셨더군요.

네, 마이애미아트페어, 샌프란시스코아트페어, 시카고아트페어, 팜스프링아트페어에 작품을 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백남준 선생님과도 가까이 지냈고 그 분의 작업하시는 걸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현대미술의 한 복판에 이름 석자를 내려면 얼마나 치열하게 샅바싸움을 해야하는 가도 보았습니다. 뉴욕을 목전에 두고 건강이 좋지 않아 포기한 게 아쉬움이 많죠.

그 아쉬움을 고향의 문화발전을 위해 더 쏟아주시기 바랍니다.

가끔 해남에 갈 때마다 느끼는 쓸쓸함은 어쩌면 일방적인 고향사랑에 대한 섭섭함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주는 섭섭함이 아니라 내가 기대한 해남이 아닐 때, 예를 들어 전원도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건설이라든지, 여수나, 목포나 부산과도 차별화되지 않는 가로수나 주거환경, 바닷가 풍경들 때문입니다. 해남은 정말 다른 곳이어야 하는데 말이죠.
예컨대 공룡박물관만 해도 더 흥미있고도 교육적으로, 공룡 꼬리 쪽으로 들어가 내부를 구경하고 머리 위로 나와 바닷가 일대를 조망하는 형태를 구상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위환경 전체를 캔버스로 보면 화가의 눈에 정말 많은 구상이 떠오를 것 같군요. 2003년에 크게 앓으셨는데 그 이전과 이후에 작품에 변화가 있습니까?

건강을 상한 후로는 많이 그리지는 못하고 가끔 조형물 작업을 했습니다. 미술평론가 김복영선생님이 2003년 일민미술관 전시회 화집 발문으로 이런 글을 쓰셨더군요.
"90년대 초에서 말에 이르는 10여년 간 박수룡이 추구했던 그림들은 해체된 인간과 곤충류의 알레고리를 빌린 자화상으로, 내면세계를 응시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자아의 얼굴을 그려내려는 다소 버거움에 눌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의 작품들은 어둡고 무겁거나 다소 생경한 조형성에다 형상들이 튀고 윤곽이 저돌적인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2002년 신동아가 마련한 특집기획 '붓따라 길따라'에 참여하면서 내면화 과정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형상과 색채 면에서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근작들은 표정에 있어 해맑아진 것이 틀림없다"고요. 1년여 동안 자연과 함께하면서 우리나라의 풍광이 갖고 있는 색깔과 조형미를 한결 간결하고 순화된 것으로 받아들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풍광이 갖고 있는 색깔과 조형미'를 탐색하셨다면 전라도나 남녘땅 해남의 조형미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저는 고향이 서울이 아니고 해남인 것이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서울에서 전혀 아름다움을 못 느낀 반면 시골길이나 못난이 소나무, 메뚜기, 바다…. 이런 것들의 아름다움은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비산비야(非山非野), 산도 아닌 것이, 들도 아닌 것이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독특한 지형적 특색을 보여주죠.
비가 오면 새빨간 황토위로 푸른 보리밭의 보색이 선명하고, 바닷가에 해당화가 피어있는 풍광은 서울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풍경입니다. 해남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조형감이 저의 머리 속에는 다 들어있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선생님의 작품에 간간히 보이는 동물이나 새의 이미지는 미황사의 부도탑에도 있고 우황리의 공룡발자국에서도 본 것들이군요.

하하, 그런가요? 저만 그런 게 아니고 남녘 쪽 사람들은 골기와 함께 서정이 있어요. 골기와 서정은 우리 고향사람들이 타 지역과 다른 차별성이면서 저의 그림주제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