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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가족처럼 여기며 작은 수술하나도 기도로 시작, 최선을 다하는 인술관으로 명의의 반열에 오른 김성전이비인후과 원장. "수술 잘한다"는 입소문 하나로 오늘을 이뤘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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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약속 시간인 지난 토요일 오후 1시, 신촌로타리에 있는 병원에 정시에 도착했는데 아직도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있다. 예약을 하지 않아 두 시간째 기다린다는 나이 지긋한 두 아주머니가 서로 의사선생님의 명성을 확인해 준다.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 출신 김성전 이비인후과 원장(69)은 특히 이비인후과 계통 수술로 유명하다. 비염, 중이염, 축농증 등 낫기 어려운 만성 환자도 그의 손을 거치면 재발없이 깨끗이 낫는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1시간 남짓 나머지 환자들을 다 본 후에야 코수술 잘하기로 이름난 김성전 원장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한 환자분이 멀리 화곡동에서 일부러 원장님 진료를 받으러 왔다고 하더군요. 하루에 치료받는 환자들이 몇 명이나 됩니까?
허허, 그걸 공개하면 큰일 나지요. 세무서에서 당장 들이닥칠 것 아닙니까? 이건 농담이고, 아침 7시부터 나와 준비를 하고, 환자위주로 진료를 하다 보니 다른데 보다는 많은 편이지요. 얼마 전에는 뉴질랜드에서도 수술 받으러 일부러 왔다고 하더군요.
이비인후과 의사로 명성을 얻으셨는데 원장님이 개업하실 당시 이비인후과는 인기 있는 과가 아니었지요? 왜 이비인후과를 택하셨나요?
당시 70년대에는 외과가 인기였어요. 의대에서 공부 잘하면 외과를 택했지요. 그런데 나는 진짜 수술은 잘 보이지 않는 곳, 코나 귀나 뇌와 관계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 이렇게 인기순위가 역전될지는 몰랐어요. 내가 학교 다니던 그 때, 광주에 이비인후과는 반상진 이비인후과라고 하나 밖에 없었거든요.
전남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개업을 하실 생각을 하신 것이 궁금하군요.
졸업과 동시에 대학에 남을 수도 있었는데, 어렵게 형님 도움으로 대학을 마쳐 빚을 갚고 싶었지요. 당시 인턴의사 월급이 1,000원이었는데 미국에 가면 월 300~500달러를 받았어요. 미국의사시험에 합격하고 준비를 하다가 우연히 서울에 남아 개업을 하게 되었지요.
신촌하면 세브란스라는 유명한 의대가 있는 코앞인데 지방대학출신이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은 대단한 도전이군요.
아, 처음부터 병원이 잘된 것은 아니죠. 아주 고전을 했어요. 그런데 수술 하나만은 자신이 있었지요. 왜냐하면 내가 군대에 가 있던 70년대 초에 이비인후과 출신 군의관은 거의 없어서 모든 수술이 다 나한테 돌아왔습니다. 3년 동안 하루도 쉴틈 없이 그야말로 수술을 해댔으니까요. 내가 남한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는 이 때다 싶어 수술을 미루고 군대에 들어온 사병들에게는 "너 수술할 돈 없지. 여기서 하고 나가라"고 강권을 하기도 하고요. 하도 수술을 많이 하다 보니 이제는 그 사람 얼굴모양만 보고도 코 속, 귀속이 다 보입니다. 하하.
운이 좋게도 국가가 원장님께 넘치게 임상체험기회를 준 셈이네요.
그렇죠.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제가 미국에 가지 않고 여기 남아있게 된 이유도 하나님한테 받은 달란트를 우리나라에서 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엔 전쟁공포까지 있어 미국에 가려는 의사들이 꽤 있었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죠.
기독교인이시고 교회에선 장로님인데 일요일에도 진료를 하신다고요?
네. 매주 일요일에도 오전에 1시간씩 진료를 합니다. 의술은 하나님이 준 선물이고, 병원과 의사는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거죠. 응급환자가 아니라도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이 있다면 종일 병원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건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요일 진료가 기독교교리와 배치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일요일에 병을 고쳤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흔히 의술을 인술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의미가 뭘까요? 진정한 인술의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인자(字)를 한문으로 보면 사람인(人)변에 두이(二)자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의사와 환자, 혹은 의사와 신과의 관계라 할까요? 생명을 구하는 일은 혼자 할 수 없고 아무리 쉬운 수술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믿음과 신뢰하는 관계가 환자의 병을 낫게 하지요. 그래서 저는 수술에 앞서 꼭 환자와 손을 잡고 함께 기도를 합니다. 한번은 스님이 수술하러 왔는데 기도가 끝나자 '아멘'하더라고요. 언젠가 정읍에서 온 여자환자는 1년 후 다시 와서 "나 치료받으러 안 왔어. 나 예수 믿어! 병도 다 낫고..."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환자들을 많이 치료하시니 기억에 남는 환자들도 많겠군요.
뇌막염 직전까지 갔던 중이염환자가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이었는데 세브란스병원에서도 위험하다고 수술을 해주지 않아서 왔더군요. 그 때는 밤 10시까지 외래환자 볼 때였는데 9시경에 찾아왔어요. 고름이 뇌쪽으로 흘러 그냥 두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돼 바로 수술을 시작해 끝나고 나니 새벽 2시더군요.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 찾아온다니까요.
이제 원장님의 고향사랑, 해남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들려주십시오.
가끔 해남에서, 특히 명절 뒤 끝에 친지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는 고향 환자들이 있는데 참 고맙고 반갑지요. 어렸을 때 화원국민학교를 들어가 2년 마치고 중화국민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 학교 3회 졸업생인데 모교가 폐교돼 너무 섭섭합니다. 하다못해 도서라도 보내주고 싶고 장학금도 낼 수 있는데…. 다행히 두륜회라고 해남출신 재경인사들 몇이서 조금씩 기금을 모아 노인들 개안수술이나 이웃돕기는 하고 있는데 어디 의미 있게 봉사할 수 있는 일 있습니까?
해남에 탯자리를 둔 사람이면 모두들 두륜산을 사랑하고 모임에 두륜회라는 명칭을 많이 쓰더군요. 원장님이 참여하시는 두륜회를 좀 소개해 주시지요.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두륜회라는 명칭은 대흥사의 불교학술대회에도 쓰였어요. 다산 정약용에게 차를 가르쳐 준 혜장스님도 나이 서른에 이 두륜회의 주맹(대표)이었다고 나오지요. 명칭이야 해남사람 아니라도 쓸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회장을 맡고 있는 두륜회는 1977년 10월 향우회조직에 앞서 만들어졌는데 윤태현(크라운제과 회장) 박동희(주택은행장), 김학래(백양메리야스 사장), 김재열(세정신보 사장), 홍현덕 회장, 채석봉(변호사), 이국식(한국은행 조사부장) 서형렬(재무부 국고총괄국장), 이경식(법무사), 이강현(한국일보 부장), 이찬호(보사부 과장), 성하철(건축사), 박점수(전우신문사 차장), 김동희(호남정유 지점장), 박춘수(MBC TV방송국차장), 윤내현(단국대학교 부총장)등 16명이 참여하였죠. 윤태현 회장께서 일천만원을 두륜회 기금으로 희사해 회원 전원이 재경해남향우회를 창립하는데 있어서 큰 에너지원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많은 분들이 작고하기도 하고 새로 들어온 분들도 계시는데 일종의 해남출신 친목모임이지요. 단 정치색은 배제하려고 해요.
의미 있게 봉사할 수 있는 일을 물으셔서 드리는 말씀인데 두륜회가 뜻이 모아진다면 지역사회 문화상이나 봉사상 같은 것을 만들면 좋지 않겠습니까? 자꾸 인구가 줄어드는데 고향에 남아 문화를 가꾸고 봉사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 좋은 의견입니다. 그렇잖아도 국제라이온스협회354-D지구 총재를 맡으면서 사회봉사의 참 뜻을 깨닫고 실천하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마음처럼 쉽지가 않더군요. 우선 고향에서 올라온 농산물부터 사먹는 운동을 하고 자주 고향에 가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지요.
고맙습니다. 원장님의 개인명의나 라이온스협회가 후원하는 지역사회봉사상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김원자 편집고문, 언론인, 호남대객원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