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신문/해남을빛낸사람들
박동희 시당장학회 이사장
희망의 시작 땅끝해남
2010. 7. 13. 07:31
박동희 시당장학회 이사장 |
"경제 어려워도 지역인재 육성사업 지속돼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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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주택은행장과 중소기업은행장을 거쳐 1986년 대신경제연구소 대표를 지낸 후 대신개발금융, 대신 투자자문, 대신증권 대표를 거쳤으며 대신그룹 부회장을 지낸 박동희씨(81)는 해남이 낳은 대표적인 금융인이다. 요즘 대학문을 나서는 젊은이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곳 1위로 꼽는 금융계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유교의 영향으로 돈 밝히는 것을 금기시했으며 수재들은 법학이나 의료계 쪽으로 진출했다. 5년제 순천중학교를 나온 박동희 이사장은 어려서부터 경제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작심했다고 한다. 고려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를 들어가 스물 세 살이던 2학년 때 행시에 합격하고 졸업과 동시에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으로 출발, 한평생 재계와 금융계에서 뼈를 굳혔다. 지금은 부친이 세운 시당장학회 이사장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고 있는 박동희 이사장을 서초동 자택으로 찾아가 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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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은 넉넉해서도 아니고 남다른 교육열정이 있었기에 장학사업이 가능했던 것이라며 기금이 좀 더 모아져 장학회가 발전됐으면 좋겠다고 하는 박동희 이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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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1930 해남군 화산면 월호리에서 출생 화산초등학교, 순천중학교 졸업 1955 고려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 졸업 1959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행정대학원 수료 1953. 6 제4회 국가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1954. 2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 1963. 12 외무부 외환국 외무관리과장 1968. 2 재무부 총무과장 1968. 8 전매청 생산국장 1970. 3 재무부 서울 세관장 1971. 7 재무부 관세국장 1973. 3 조달청 차장 1974. 2 관세청 차장 1976. 11 한국은행 감사 1977. 4 한국 주택은행장 1979. 5 중소기업은행장 1982. 11 삼희투자금융 대표이사 1986. 8 대신경제연구소 대표이사 1987. 11 대신종합개발금융 대표이사겸직 1988. 12 대신투자자문 대표이사 1990. 5 대신증권 대표이사 1991. 11 대신증권 부회장 1992. 12 주은투자자문 대표이사, 회장 1996 A. M 파이낸스 회장 1992~현 시당장학회 이사장
표창
1963 대통령표창 1969 재무부 장관표창 1976 홍조 근정훈장 |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이사장님을 초대석에 모시도록 추천해 주더군요. 주로 서울에서 재계와 금융인으로 한평생을 사셨는데 요즘 대학 졸업생들의 직업선호도를 생각할 때 선견지명이 있으셨군요.
"허허 그런 것은 아니고, 집안이 대단한 부자는 아니었지만 어렵지도 않아서 꼭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경제학공부 자체가 참 좋았어요. 그 때 순천에서는 민족계열인 고려대학교를 많이 갔지요."
이사장님의 지나온 길을 보니 자녀들의 금융업진출을 적극 권장한다는 유태인가문들이 생각나는군요. 부모님들의 영향이 있었습니까?
부친은 전형적인 한학자셨습니다. 일제 때 일본의 신식교육을 배우지 않고 한학에만 전념해 어릴 때 사서삼경과 경학, 주역을 다 공부했다고 들었습니다.
한학만 하시다 3·1운동 후에 배워야 만이 국민이 똑똑해지고 그로 인해 독립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하지요.
그래서 1930년부터 40년까지 마을에 한문서당을 열고 수업시간 간간히 안중근의사 이야기며 일장기를 달고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선수이야기를 들려주며 나라의 중요성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해방 후에 화산중학교를 설립하시고 1968년 해남향교 전교를 역임하기도 하셨는데 평생 교육자로 사셨지만 특별히 경제교육을 강조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시당(時堂) 박장수 어르신은 해남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의 장남으로서 가까이서 보신 부친의 특출하신 면모를 들려주십시오.
제가 말씀드리기는 뭣하지만 그 분의 한평생 업적을 기록한 時堂集이 추모집 형태로 2007년에 발간이 되었어요.
서화작품 100여점과 한시집인 소남만록(素南漫錄)에 수록된 한시들을 번역한 작품들이 소개돼 있고 해남에서 펼쳤던 교육사업과 시당장학회를 설립한 교육철학, 장학회 활동 내역들이 나와 있는데 한번 읽어보세요.
"사람은 항상 정직해야한다"는 말씀을 두고 쓰시고 서도를 통해 가정교육과 검소 정신을 가르쳐 주셨지요. 글씨는 정신공부이기 때문에 잡념을 없앨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정진하신 결과 한번은 유진산(柳珍山)씨가 글씨를 받으시고는 의제 허백련(許百鍊)님께 보였더니 "그 글씨를 날 주고 내 그림 중에 하나를 가져가시라"고 했다더군요.
특히 아버님의 글씨는 시당체라고 불릴 만큼 독자적인 서체를 선보였는데 그중 초서는 여초(如初 )선생님이나 김창환(金昌煥)선생이 우리나라 최고의 글씨라고 칭찬을 했지요.
아~ 지금 맡고 계시는 시당장학회의 시작이 부친의 그 유명한 글씨로부터 조성되었군요.
그렇지요. 시당장학회가 올해로 30회째를 맞았는데 1980년 6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그동안 모아둔 서예 작품으로 개인전을 연 수익금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개인전에서 얻은 수익금이 2천500만원 가량 되었는데 사재를 보태 3천만원으로 시당장학회를 설립하고 이듬해부터 해남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1988년 미수를 맞아 서울 백상기념관에서 시당88수전(壽展)을 개최하고 그 수익금 2000만원까지 합해 지금에 이르고 있지요.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개인이 만든 장학회로는 독보적인 것이지요. 그동안 700명이 넘은 학생들이 혜택을 보았으니까요.
부친의 뜻을 이어 장학기금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장학금이란 게 출연기금에 대한 은행이자로 충당이 되는데 지금은 이율이 떨어져 어려움이 크지요. 아버님은 넉넉해서도 아니고 남다른 교육열정이 있었기에 장학 사업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기금이 좀 더 모아져 장학회가 발전됐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경제가 문제군요.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직업군 중 1위가 증권회사라고 하는데 이런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보십니까?
경제활동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근원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돈을 버느냐 하는 과정이 중요하지요. 저는 증권회사 책임자를 오래 맡았지만 증권을 단기투기로 보는 사고방식에는 찬동하지 않습니다.
흔히 증권시장을 '자본주의의 꽃'이라 하는데 여기서 증권이란 주식과 채권처럼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증서란 뜻입니다.
보통 증권하면 주식만을 떠 올리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증권이란 주식보다 훨씬 더 넓은 개념이지요. 이를테면 장기금융시장이라 할까요? 장기금융시장이란 말 그대로 자금을 장기로 거래하는 시장입니다.
만기가 따로 없는 주식이나 1년 이상인 채권 등 단기금융시장과 대비되지요. 이렇게 채권이나 기업어음 등 다른 증권들도 함께 사고파는 시장을 자본시장이라고도 하는데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안정이 되려면 이 자본시장이 커지고 활발해져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자본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건전했으면 좋겠어요.
이사장님은 재정 관료와 금융계 리더로서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오신 걸로 여겨지는데 금융리더, 즉 경쟁력을 갖춘 금융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덕목과 자세가 필요할까요?
그러지만도 않았어요. 공직에서 물러난 후 1996년인가 A. M 파이낸스라고 금융회사 책임자로 있었는데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개인적으로도 큰 손해를 보았지요.
금융인은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중요합니다. 남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나 조직이 책임의식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일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합니다.
1987년 우리나라는 물론 동남아시아 전역에 위기를 불러왔던 금융위기, 그리고 서브프라임모기지로부터 시작된 미국 발 금융위기는 물론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유럽 여러 나라의 재정위기 등 세계경제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요. 이 원인을 한마디로 진단할 수는 없겠지만 왜 이렇게 전 세계적 경제위기가 끊이지를 않을까요?
방금도 얘기했지만 관련업계 종사자들의 무책임과 방만한 의식, 그리고 보다 심층적으로는 인간들의 욕심이 문제입니다.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는 애초에 미국의 부동산에서 시작됐지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금융시장의 파생상품에 끼어들면서 금융위기를 야기한 것인데 2차 세계대전 후 최대 금융위기라고들 합니다.
정부가 올바른 정책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이제 지방선거가 끝났는데요. 선거가 끝나고 나면 항상 물가가 오르고 환율이 큰 변동성을 겪는데 올 한해 경제전망을 해 주십시오.
경제전망은 무슨…. 해마다 물가가 오르니 걱정이지요. 장학금도 그대로 둘 수가 없어 그동안 중학생들에게는 20만원, 고등학생에게는 30만원 지급해 오던 것을 올해부터는 각각 30만원, 50만원으로 증액해 지급했는데 당초 40명이 받던 것을 19명으로 줄였지요.
그러나 선친의 유지인 만큼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지역인재 육성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장학회는 잘 유지 하겠습니다.
마지막 말씀에 더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사장님의 잘 지은 자식농사를 보면 700여 남의 자녀들에게 베푼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참고로 3남1녀를 둔 박동희 이사장님의 장남은 국민은행 본점 본부장, 2남은 치과의사로 한림대 치의대학원원장이며, 3남은 삼성의료원 내과의사, 그리고 장녀 인미씨는 미국 유학 후 추계예술대학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원자 편집고문, 언론인/호남대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