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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변혁'이 중심 주제인 '장공신학'을 기리기 위해 한신대학교에 설립된 장공 김재준 기념관 앞에 선 오영석 전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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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대신하여 인터넷 메일이나 휴대폰 문자가 등장한지 오래다. 편지라는 낭만적인 통신수단이 세상을 연결해주던 느슨했던 시대에 하나님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꿈을 전달하려 했던 어린 소년이 있었다.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신이었다. 소년은 그 꿈을 이루었을까? '하나님 전 상서'의 주인공 오영석목사(67. 전 한신대 총장)를 만난 건 그의 꿈이 영글고 펼쳐졌던 서울 강북구 수유동 도봉산 아래 한신대 대학원 캠퍼스, 대학교 설립자인 장공 김재준기념관 앞 잔디밭이었다.
해남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총장님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저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 '하나님 전 상서'라는 편지를 써서 무작정 우체통에 넣었다구요? 말하자면 무대포 정신이랄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꿈을 꾸시고 이룩하셨는데 어떻게 어린 소년이 그런 용기를 내셨는지요?
"하하 무대포정신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이판사판 뭐든 해보는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이 가난해 진학을 못했는데 너무나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서 견딜 수 없었지요. 어느 날은 후배가 소개해 준 목포 유달원이라는 고아원을 버스비도 없어 운전수한테 욕을 먹어가며 찾아갔는데 '가족이 있으면 유달원에서 살 수 없다'고 해서 고하도에 있는 다른 시설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어요.
거기서도 받아주지 않아 다음날 아침 목포로 나와 큰 상점과 가게를 돌아다니며 점원으로 쓰고 대신 야간 중학교를 임금 대신 보내주도록 호소를 했지요. 그러나 아무도 그 절실한 호소를 들어주지 않아 뜻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당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더 들려주십시오. 무대포정신이 통하지 않자 하나님께 편지를 쓰신 거군요.
"고아원이라도 들어가 공부하려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이전처럼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거나 논밭에서 어머님과 함께 일을 했는데 마음은 항상 공부 생각 밖에 없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년이 지나고 2년째 여름방학이 되어 동네교회에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는데, 광주에서 간호학교에 다니는 여선생님이 와서 성경을 가르쳤어요. 그 선생님은 설교와 위생교육 외에도 '장발장'같은 흥미진진한 동화를 많이 해주셨는데 큰 감명을 받았지요. 당시 나는 교회 종지기로 아침 저녁 종을 쳤는데 하루는 종이 비틀어져서 위에 올라가 바로잡고 내려오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앞이 보이지 않더군요.
선생님 같은 여성도 배우면 저렇게 큰일을 하는데, 나는 왜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허송세월하고 있나 기가 막혀서였지요. 한참을 종각 위에서 울다가 땅으로 내려와서 종을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희망하는 일이 이뤄지도록 자신이 믿은 신께 빌거나 기도를 하는데요.
"기도도 엄청 했지요. 낮에는 산과 들에서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라'고 기도하고 저녁에도 잠이 깊이 들면 하나님이 부르는 것을 듣지 못할까 봐 자다가 깨다가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때 하나님이 내편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어요."
어느날 우체통에서 편지들을 꺼내 분류하던 해남읍 우체국 직원들이 '하나님 전 상서'라는 낯선 편지를 보고 우체국장께 드렸는데 그 우체국장이 마침 해남읍교회의 신실한 신도였고, 결국 그 교회 이준묵 목사님께 전해져 공부의 길이 열렸다고 하지요. 아무렇게나 써 넣은 '편지한 장'이 그토록 원했던 학업의 길을 열어준 현실로 나타났는데 그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적입니까. 진정한 기적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렇게나 쓴 편지가 아닙니다. 그 편지를 쓰기까지 얼마나 오래 생각하고 궁리하고 또 기도를 했겠습니까? 소년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하고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담판하듯 편지를 보낸 것이지요. 나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린 나의 기도를 듣고 내 편지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대답을 기다리는 심정이었고요.
오영석 전 총장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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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 7. 18 전남 해남군 계곡면 사정리 출생 · 1962 해남고등학교 · 1969 한신대학교(신학사, Th. B) · 1971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신학석사, Th. M.) · 1982 스위스 Basel University(신학박사, Th. D.) · 1972~1975 전남 해남 백야교회 목회 · 1975~1976 전남 해남 해남읍교회 목회 · 1984~2007 한신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신학과) · 1992. 3~ 7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 객원교수 · 1997~1998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장 · 1998~2000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장 · 1999~2002 칼 바르트 학회 회장 · 2001. 9~ 2005. 8 한신대학교 총장 · 2009~현재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 |
그러던 어느 날, 김찬원이란 해남읍교회 장로님께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내 편지를 읽어본 이준묵 목사님께서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1956년 3월 6일인데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어 비를 맞으면서 사정교회 장로님께서 주신 비파나무 분재 한그루를 안고 버스에 올랐었지요. 나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린 날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은 그의 역사를 사람들을 통해 이루신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기적'이라고 하지요."
이준묵 목사님을 만나 그가 운영하시는 등대원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의과대학에 합격했는데 도중에 진로를 바꾼 배경은 무엇입니까?
"의대를 택한 건 목사님 사모님의 추천이었지요. 1962년 2월 해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선배와 함께 전남의대에서 보낸 합격증을 첨부하여 지원서를 제출하려고 버스를 탔는데 차 안에서 선배가 이런 말을 하는거예요. "아프리카에서 병든 흑인들을 무료로 치료하여주는 슈바이처 박사같은 좋은 의사가 되려면, 슈바이처 박사처럼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 받은 후에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뜻을 바꿔 1962년 2월 20일 경에 한국신학대학에서 다시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2월말에 이준묵목사님께서 등록금을 갖고 오셔서 등록을 하려는데 "오영석 학생이 일등을 하였으므로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하며 삼성모직에서 각 대학의 수석입학생들에게 준 양복 기지 선물까지 주었지요. 그 기지로 교복을 지어입고 한신대 교정에 들어서던 기억이 어제일 같군요."
해남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는 거의 성자로 알려지신 이준묵목사님 이야기를 좀 들려주십시오.
"목사님은 호남의 굴지의 기업가로 아시아 자동차 공장과 나주 비료공장을 창업한 이문환 회장님의 동생이기도 하지요. 원래 결혼을 하지 않고 수도생활을 하면서 거지 성자로 불린 이현필 선생님과 강순명 목사님과 함께 활동을 하셨죠. 어느 날 중국에 선교사로 가려고 모든 수속을 밟고 광주에 계신 부모님과 형님에게 송별 인사를 갔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집안호적에서 삭제하겠다."는 엄포에 포기를 하고 김수덕사모님(당시 간호사)과 결혼하셨다고 해요. 김수덕 사모님은 목사님보다 더 넓은 아량과 덕과 깊은 지혜를 지닌 분이셨지요.
당시 읍교회의 신자들은 20 명에 불과했는데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시면서 교회는 점차로 부흥 발전해 36년 목회하시고 은퇴하실 때, 신자들의 숫자가 400명이 넘었어요. 6·25가 나자 전쟁고아들과 걸식아동들을 모아 돌보았고 새마을 운동이 시작하기 훨씬 전인 50년 후반부터 농촌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군단위로는 전국에서 제일 처음에 해남읍에 YMCA를 창설하신 분이죠. 나주 비료공장에서 일하던 독일 기술자 호만씨의 협조를 통하여 해남에 호만학교를 설립하시고, 가정형편 상 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없는 많은 학생들에게 중고등학교의 교육을 받도록 하신 교육자였습니다."
해남출신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한신대총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총장님께서 추구하는 기독정신이랄까 진실한 기독교인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제가 한국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캠퍼스, 그것도 장공 김재준기념관 앞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바로 장공신학을 통해 기독교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장공신학의 중심주제는 '현실과 변혁'이지요. 그분은 음식 속에 들어간 소금처럼,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간 누룩처럼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현실을 그리스도 생명의 현실로 변혁해 가야한다는 생활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사회참여운동에 앞장서며 민주화 운동에 교회가 적극 뛰어들도록 길을 폈고 보수 일색으로 경직됐던 한국 신학계에 현대신학의 물줄기를 들여와 교회 갱신에도 힘을 썼지요. 그 분을 따르던 인물들, 장준하, 문익환, 강원룡, 안병무박사 등 민족사의 분수령을 이루는 고비마다 양심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사람들을 보면 참 기독교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 뒤에 도서관 입구에 써진 성경문구는 히랍어인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뜻이지요."
대학에서 은퇴를 하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한신대학교에서 교수와 총장으로서 25년 남짓 재직하다가 2005년 8월에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한 세미나를 인도하며, 세계적인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의 교회교의학을 번역하는 책임을 수행하고 있지요. 그의 신학사상은 20세기 초에 신학사상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의 교의학 책이 워낙 방대하고 깊고 어려워서 번역하기가 어려운데 13명의 저명한 교수들이 참여해 많은 진전을 이뤘지요. 그 책이 모두 번역 출판돼 학생들과 목회자들이 읽고 공부를 한다면, 한국교회와 강단의 생명력은 훨씬 풍성해지고 활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지난 해 여름부터 네 달 동안 고향 해남읍교회에 오셔서 목회를 하셨는데 아주 오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네,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어서 잠시 설교목사로 갔었는데 기회가 되면 고향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기름진 흙을 실컷 밟으면서 해남에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도 잠을 잘 때 꿈을 꾸는데 꿈의 대부분이 거의 고향에서 펼쳐집니다. 금강곡의 맑은 물소리와 풍경들, 중고등학교 때 땔감을 하러 갔던 우슬재, 해남군청 광장 앞의 아름드리 나무들과 시끌벅적한 고도리 장터는 마음이 울적할 때면 찾아가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요.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특별히 이준묵 목사님과 사모님의 큰 은혜와 해남읍교회에서 큰 도움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보답하지 못한 빚진 죄인의 심정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한신대 장공기념관 앞에서 뵙게 돼 매우 즐거웠습니다. "해남이 한국에서만 아니라 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문화의 고향이 되기를 바란다"는 총장님의 기도가 꼭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김원자 <편집고문·언론인 호남대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