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면 월호리 출신 대학자를 만나기로 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을 지내고 정년퇴임 후부터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대학원 고문헌관리학과 창설과 동시에 초빙되어 한국고문서학의 교육을 위한 교과과정, 학과운영, 고문서학 강의에 주력하고 있는 박병호 교수님이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정규대학체계 밖에서 지금까지 10명의 학생을 직접 지도해 문학박사로 키움으로서 고문서학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분이다. 소문이 났던대로 박병호 교수님(80·전 서울대 법학과 교수, 학술원회원)은 노익장이셨다. 만나기로 한 여의도우체국 계단 앞에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건장한 한 분이, 한 손엔 책가방을, 한 손엔 우체국에서 파는 포장용 박스를 손에 들고 서계셨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아 인근에 있는 인터뷰 장소인 한일문화교류센터까지 택시를 잡으려는데 한사코 걸어서 가자고 하신다.
요즘 근황이 궁금합니다. 한때 간염으로 고생하시다 전통의학요법으로 완쾌하셨다고 뉴스에 났었는데 역시 건강이 좋으신 것 같군요. 무슨 비결이 있으신가요?
광주출신 기준성씨의 자연건강법이라고 있어요. 그 분이 자연식 말고도 네가티브 요법이라 해서 부항에 관한 발명특허를 내었는데 그걸 지금까지 쭉 해오고 있지요. 아주 좋아요. 또 밥을 꼭 현미잡곡밥으로 해 먹어요. 현미쌀에다 쥐눈이콩, 수수, 율무, 차조, 찰보리를 섞어 압력밥솥에 해놓으면 먹기도 좋고 맛도 있지요. 또 운동을 많이 하는 편이예요. 60대까지는 아침마다 관악산을 올랐는데 70대 이후부터는 구보로 바꿨지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8km씩 걸었는데, 요즘은 4km를 걷지요.
1931년에 전남 해남군 화산면 월호리에서 출생하셨는데 부친과 모친은 어떤 분이셨는지요. 어렸을 적 고향에 대해 기억하시는 일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부친은 성당 박철수(1907~2006), 모친은 양천 허씨 정현(1907~1988)의 4남4녀 중 장남으로 났습니다. 부친이 1950년 5월부터, 그러니까 6·25동란 중 전남도지사를 하신 분이죠. 부친은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가훈으로 후손들은 마땅히 지켜야한다는 서론과 함께 신호붕우(信乎朋友) 등 12개의 사자성어를 일일이 새겨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놓고 외우게 할 정도로 엄하셨던 분입니다. 학창시절 중 국어와 불어에 크게 흥미를 느껴 그 쪽으로 대학진학을 하려하자 극구 말리며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이니 수산대학 아니면 법과를 나와 판검사나 관리가 되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분 말씀대로 관리는 못되었지만 법대에 진학해 효도를 하긴 했는데 고문서와의 인연은 어머니 쪽 영향입니다. 외조부가 서예와 사군자에 능하신 효봉 허자 소자 어르신인데 어렸을 적 우리 집에 오시면 10일에서 한 달간씩 머물며 내게 습자본을 만들어 주시고 먹가는 법이며 문방사우와 친하게 하셨죠.
초등학교, 그러니까 보통학교는 어디서 다니셨고 고향에 기억나는 동창이나 친척이 있나요?
부친의 임지를 따라다니다 보니 광양 서공립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가 3년을 마치고 담양 동공립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어렸을 적 친구들이 이제는 많이 타계를 했겠지요.
중학교를 서울로 가셨는데 집안에서 기대가 컸겠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십시오.
중학교 입학은 광주서중학교로 했습니다. 동창 중에 금호그룹 회장을 지낸 박성용(朴晟容)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언론인 출신으로 금호문화재단 고문을 한 이강재 등이 있지요. 광주 서중학교 2년을 다니고 중앙중학교에 전학을 했는데 당시는 민족학교라고 고려대학교 재단인 중앙중학교를 많이 갔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학교다닐 때 국어와 불어를 좋아했지요. 국어 고문을 주시경선생의 아드님이신 주왕산 선생이 가르쳤는데 두시언해 강의가 그렇게 좋았고 종로 5가에 있던 불어강습소에 등록하여 불문학 공부도 하면서 마치 문인이 된 기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결국 법대에 진학하시고 문학과 서화는 취미로 남으셨는데, 다시 고문서연구에 말년을 보내고 계시니 운명적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교수님은 한국 법제사연구의 대가로 많은 연구업적을 남기시기도 했는데 평생의 업적을 나눈다면 어떻게 정리할 수 있습니까?
업적이라 말할 것 까지는 없고 구태여 구분하자면 법사학 학술연구와 고문서 정리 및 해석분야, 그리고 평생 해온 연장선상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제정한 영산법제사 학술상 제정이라고 할 것 같군요. 내가 말하기는 쑥스러운데 학술부문은 2007년 영산법률문화재단(이사장 윤관 전 대법원장)이 수여하는 제3회 영산법률문화상을 주면서 이렇게 적었더군요. "38년간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의 전통법문화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한국법제사라는 기초법 분야를 체계화시키고 하나의 독자성 있는 학문분야로 자리 잡게 하는데 크게 기여한 점을 높이 샀다."라고요. 두번째 고문서 정리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술적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틈만 나면 음악과 서예, 글쓰기를 좋아했고 저도 한시를 읽으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을 수가 없었어요. 대학에서 당시 중앙도서관 관장으로 보직을 맡고 계시던 정광현 교수님 지도를 받았는데 그분 곁에서 많은 고서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죠. 석사학위도 당초 민법 쪽을 택하려했으나 교수님의 엄명으로 법제사쪽으로 정했고 대학에 교수가 되기 전부터 고문서정리 촉탁일을 하게 된 인연도 크지요. 1996년 정년퇴임한 후에는 40여년 강의했던 가족법, 한국법제사 등과는 결별한 체 국사편찬위원회 초서연수과정에서 한국고문서학과 초서사료강독을 담당하였고 정신문화연구원의 초서강독, 고문서학회창립 및 연구지발간 등을 해왔지요. 지금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나가 일주일에 두 번 강의를 하며 후진양성을 하고 있어요.
사재를 출연하여 만드신 '영산법사학 상'의 배경과 시상제도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영산법사학 상'은 영산법률문화재단이 주는 상과는 좀 다른 것이죠. 우연히 영산이라는 이름이 같아 오해를 하기도 하는데 제가 그 문화재단이 수여하는 제3회 법률문화상을 받았어요. 당시 상금이 5천만원이나 되었는데 그 돈을 의미 있게 쓰고 싶어서 개인 돈 5천만원을 더 보태 제 호를 딴 '영산법사학 학술상'을 만들게 되었지요. 얼마 되지는 않지만 2회까지 시상했고 올해 3회째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습니다.
발표논문 중 '한국전통사회와 법'에 대한 내용이 많은데 우리 전통사회의 '법'은 어떠했습니까? 흔히 '윤리' '도덕'이라고 하는 것과 법의 차이는 무엇일가요?
법은 예치(禮治)를 위한 보조수단이라는 공맹의 '예주법종'사상이 우리나라, 특히 조선시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사상가인 정약용의 저서 '경세유표'도 '예'는 천리와 인정에 합당한 법'을 뜻한다며 예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함을 강조했지요. 조선시대 민사의 영역에서 '이'가 중요한 판단기준이었으며 '이'는 사물에 내재하는 보편적 이치인 사리를 뜻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과 함께 이같은 전통적인 법관념이 퇴색하기 시작, 법과 윤리와 도덕을 별개의 개념으로 파악하게 되었지요. 일제시대 강압통치 수단으로 모든 실정법은 예외없이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강제되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죠. 우리나라의 법률은 특별한 기술적인 분야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대부분 유교적 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법의 운용에 있어서도 법조문을 정확히 인용하되 그 배경이 된 유교경전의 정신을 충분히 살려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성이어서 그런지 선생님께서 가족법개정에 찬성하신 내용이 인상적이군요. 우리가족법의 문제는 무엇이며 앞으로 더 고쳐야 할 방향은 어떻습니까?
아, 가족법 개정에 당연히 찬성을 했지요. 60년대에 가정법률상담소를 만드신 이태영 박사님은 대학선배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의식도 변하고 있는데 전통만 고집해서는 사회발전은 요원합니다. 호주제도란 일제의 잔재인데 개정이후 아무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가부장제나 남성우위전통이란 원래 우리전통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같은 외침 시에 필요한 전시형 제도이지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엔 남녀평등, 여권이 강했던 전통이 있어요.
3남 2녀를 키우시면서 특별히 강조하신 점이나 교육철학이 있으신지요?
자녀에게 무엇을 강조하거나 당부하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하게 하고 학자로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언의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년도에 서울대 동창회보에서 10명이 동문가족이라고 소개를 한 적이 있는데 장남, 박진우(국사학과), 차남 박한우(사법학과), 작은 며느리 김지현(의학과), 큰사위 권기범(법학과), 그밖에 남동생 박병서와 사촌형 박병훈, 박동훈, 매제 정정훈을 소개했더군요. 지금은 몇사람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어떻든 집안에 박사와 교수가 많은 것은 근검절약과 학문을 중시했던 선대의 영향인 것 같아요. 다섯 자녀들이 각계에서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고 11명의 손자손녀 외손들이 사회에 나가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그 밖에 하시고 싶으신 말씀은?
사람에게는 자유욕구성과 통제욕구성이라는 두 개의 근본적 본능이 있는데 나의 지난 80년 인생은 중요한 고비마다 자유욕구성이 억압되고 통제적 규율 속에 살았던 인생인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는 일제와의 전쟁 속에서 인내와 극기를 강요받았으며, 대학에 들어가서도 겨우 2주간 공부하고 피난길에 올라 1년을 휴학한 뒤 복교했더니 전국의 대학 졸업예정자들이 간부후보생으로 교육을 받게 되어 결국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졸업을 하게 되었지요. 선친께서는 내가 자유분방하고 의지가 약한 점을 걱정하시어 귀가 아프도록 '인내와 신념'을 강조하시며 '풍월을 읊지 말라' '한시짓기를 하지말라'고 하셨는데 지금 세상 같으면 그러지 않으셨겠지요. 결국 인생에 낙오는 되지 않았으나 아쉬운 점이 많아요. 특히 한 가지 아쉬운 것이 바둑을 배우지 못해 노후에 친구와의 파적(破寂)거리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점이지요. 하하.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100세에 타계하신 부친처럼 계속 노익장을 유지하시고 지금이라도 바둑을 꼭 배우시길 권합니다.
김원자 <편집고문·언론인 호남대 겸임교수>
박병호(朴秉濠) 1931. 5. 13 전남 해남군 화산면 월호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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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 광양공립심상소학교 입학, 담양공립초등학교 졸업 광주서중학교 입학, 서울 중앙중학교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
■ 주요 경력 1958∼1962 고문서정리 촉 탁 1963∼1996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 수 1967∼1968 서울대학교 법률도서관 관장 1975∼1978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 관리실장 1980∼198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학부장 1987∼1989 서울대학교 도서관 관장 1990∼1992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1996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명예교수 1989∼1997 한국법사학회 회 장 1991∼1995 한국고문서학회 회장 1994∼1995 한국가족법학회 회장 1997∼199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자료심사실 객원교수 1998∼2000 학교법인 한성학원 이사장, 이사 2000∼현재 한국학대학원 초빙교수 2008~현재 학술원 회원
■ 주요 저서 한국법제사 특수연구(1960) 전통적 법체계와 법의식(1972) 한국법제사고(1974), 한국의 법(1974) 한국의 전통사회와 법(1985), 가족법(1985) 세종시대의 법률(1986), 가족법논집(1996) 근세의 법과 법사상(1996) 호남지방 고문서기초연구(1999) 조선양반의 생활체계(2004) ■ 상훈사항 1986. 9 법률문화상 1989. 12 금호학술상 1992. 5 국민훈장 목단장 1997. 5 현암법률저작상 2004. 10 한국토지법학회 제1회 학술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