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시작 땅끝해남
2010. 3. 17. 11:17
강남 길 해남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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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묘소 앞의 쉼터. 자연 그대로를 최상의 미적 덕목으로 쳤던 고산의 생각은 자연석으로 꾸민 묘소 앞의 쉼터로 남았다. 녹우당 어초은공의 묘도 이와 비슷하고 해남 인근 지역의 여러 묘제들에서 이런 형식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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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석우,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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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遊牧)의 시대물살을 거슬러 '정주(定住)를 결심 하고 고향에 온 나는 혈연과 지연을 내가 생존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로 생각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17년 동안 고향에서 살다가 도시로 나가 30년을 살다 다시 고향에 돌아온 내가 작년 한 해 동안 했던 중요한 한 가지 일은 되도록 빠짐없이 집안 시향(時享)에 드나드는 것이었다. 그런저런 연장선상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귀향한 집안 아재와 참례했던 곳이 금쇄동이다.
그 독특한 지형(현산면 구시리, 만안리 일대)에 매료되어 성을 쌓고 그곳을 경영했던 고산(孤山 尹善道) 스스로도 말했듯이, 그곳은 '하늘이 감춘 땅'(金鎖洞)이었다. 작년 말 도시의 삶을 털고 내려와 이곳을 처음 찾아갔을 때, 그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지세가 던진 의미의 연쇄고리에 깊이 빠져버린 나는 하마터면 며칠 동안 길을 잃을 뻔 했다.
흔히 인적을 멀리하고 있다고 회자되는 절, 바로 곁에 있는 대흥사에 그렇게나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만, 지척에 있는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인기척이 없었다. 며칠 전의 답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곳에 들기 바로 전 초입에 주차된 한 대의 대절버스를 보았는데, 앞 유리창에 '수연풍수'라고 적힌 표지가 붙어있었다. 아마도 서울 어디쯤에서 풍수지리를 궁구하는 사람들이 현장답사 차 찾아온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올라가는 동안 등산복 차림에 자침을 허리춤에 단 그들 일행은 벌써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전통시대의 덕목, 그중에서도 '물아일체'와 같은 말은 원융과 조화, 생태적 가치가 무엇보다 중시되는 이즈음 우리들의 주요한 삶의 자세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데, 정작 이런 자산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 지역의 우리들은 그것들을 너무나도 경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저 이름 없는 금쇄동엔 인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잠깐, 그 무욕의 선계가 보여주는 육안의 시선을 거두고 가만 더 깊은 내면의 고요를 응시해보자면, 딱히 그렇게 이곳에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길 바라는 것도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탐욕의 무리들에겐 욕계의 허상이 먼저 눈에 띄는 법. 고산이 말했던 금쇄동과 문소동, 수정동의 원림은 그것 자체 보다는 그것을 넘어선 그 어떤 지점에 더 깊은 혜안이 담겨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아득한 일이다. 해남 사람 고산이 물경 1640년, 귀양이 끝난 뒤 풍파에 찌든 몸을 이끌고 돌아와 그곳에 이름을 붙여줬다. 하늘이 점지해 준 '꿈'과 그곳 계곡과 바위와 나무, 물과 바람, 그리고….
54살에 들어와 10년을 살면서 남긴 그의 작품들(산중신곡)을 두고 작금의 현학들은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주옥같은 작품이라고 칭송들을 늘어놓지만, 정작 현실로 돌아와 봤을 때 그에 필적할 만한 '전승의 노력을 기울였나'에 대한 회억의 눈꺼풀이 내리깔린다. 하여 우리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금쇄동 뒷허리춤의 그 비탈진 산능선을 달마의 뒷덜미처럼 최후의 마지노선으로 삼아 임금이 계셨던 곳(한양)을 홀연히 지켜보는 백골난망의 봉토에 부복하며 읊조렸다. '죄 닦음을 하려고…'
'땅의 끝'이라는 말은 어딘지 가변성이 짙은 '관광'성 '개발용어'와도 같다는 생각도 해봤다. 내게 관광은 그저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는 일회성 관광버스를 생각나게 한다. 또한 나는 생각해본다. 강의 남쪽, 바다의 남쪽. 어쩌면 그것은 협소한 지역단위 이름과도 같고 말하고 듣기에도 그만그만한 장삼이사 범부들의 땅이름 같을지라도 나는 그 말이 풍기는 느낌이 좋다.
1980년의 광주가 그저 그런 땅이름 광주가 아닌 민주의 대명사로서의 광주였듯, 이 시대 해남 역시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골똘하게 해봤다. '하늘이 감춘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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