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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틈서 붕어잡고 멱감던 시절 그리워라

희망의 시작 땅끝해남 2009. 3. 30. 09:33

바위 틈서 붕어잡고 멱감던 시절 그리워라
굽이굽이 해남천
2009년 03월 24일 (화) 12:04:05 박영자 기자 hpakhan@hnews.co.kr

 뱀 모양처럼 굽이굽이 돌던 하천, 커다란 바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하천 주변에 저잣거리와 읍장이 들어섰던 해남천, 아이들은 떼 지어 고기 잡으며 멱을 감았고 빨래며 나물 씻던 아낙들이 밤에 몰래 나와 목욕했던, 이젠 추억 속에나 남아 있는 해남천의 옛 모습이다. 
 해남천은 60년대 초반 직강공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띠게 됐다.  
 그러나 60년대 이전에는 해남천은 뱀이 기어가는 모양이었다. 당시 해남천은 지금의 해리 웅진발라트 앞에서 신동백아파트를 끼고 다우아르미안 옆을 통과해 금강여인숙 앞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굽이굽이 도는 하천이었다.
 동백아파트 앞과 현 하천 사이에는 1000여 평에 이른 솔밭이 있었고 솔밭에는 200~300그루 소나무가 군락을 형성, 장관을 이뤘다.

부랑자·나무꾼 북적인 홍교
 해남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홍교이다. 다리모양이 무지개처럼 생겼다고 해 홍교라 불리는 이 다리는 나무다리였다.
 60년대 이전 홍교 밑은 부랑자들의 거처였고 다리 위는 땔감을 팔러 나온 나무꾼들과 저잣거리를 드나드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연탄이 들어오기 전 해남읍의 땔감 거래는 홍교 옆 현재의 어물전서 이뤄졌다. 이곳에 살았던 이두수씨(73)는 당시 삼산면 나무꾼들은 장작을, 읍 학동 나무꾼들은 갈퀴나무를 주로 팔았단다.
 이때 나무꾼들은 나뭇짐 모양이 좋아야 남보다 먼저 팔기에 장작과 갈퀴나무를 보기 좋게 사각형 모양으로 만들어 나왔다.
 나무저잣거리 건너편 하천 둑에는 길게 늘어선 리어카가 장관이었다. 행인들의 짐을 실어다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리어카의 모습은 80년대 후반까지도 이어졌다.
 낮에는 리어카와 나무꾼들 차지였던 홍교 인근은 밤에는 해남극장과 저잣거리를 찾는 한량(?)들로 붐볐다. 현 다솜유통 자리에 위치한 해남극장은 밤에 공연과 영화상영을 했고 그 인근 술집도 불야성을 이뤘다.
 조선시대 홍교는 해남8경 중 하나로 꼽혔다. 커다란 바위 사이를 웅장하게 굽이쳐 흐르는 물이 사람의 마음과 시선을 모두 빼앗았다는 게 8경으로 꼽힌 이유이다.
 당시 홍교 밑에서 문호길 산부인과 앞 해남교 밑까지는 바위계곡이었다. 커다란 바위 사이를 물은 굽이쳐 흐르고 바위 틈에서 아이들은 가재랑 붕어랑 뱀이랑 장어를 잡고 멱을 감았다.  

해남읍장 섰던 천변교 
 홍교 인근이 시끌벅적 했을 때 천변교 인근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지금의 주막식당 자리 하천가는 5일장이 섰다. 수협 자리는 금융조합이, 삼성생명 자리는 군 농회가 위치했다. 수협자리인 금융조합 앞에는 우람한 벚나무들이 70년대 초반까지 군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했고 그 앞 하천에 있던 커다란 '둠벙'은 아이들의 목욕 장소였다.
 지금의 삼성생명 자리에 있었던 군 농회 인근은 모두 일본인이 경영하는 뽕나무 밭이었고 뽕나무 밭은 현 동초교 앞까지 펼쳐져 있어 장관을 이뤘다.
 해방 후 누가 심었는지 능수버들이 하천을 장식했다. 주막식당 앞에서부터 홍교까지 늘어선 능수버들은 90년대 초반까지도 해남천의 장관이었는데 눈병을 일으킨다는 주민들의 민원과 하천정비사업으로 사라지고 만다.      

곡괭이로 직강공사  
 다시 해리쪽 하천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천변교에서 금강골까지 이르는 하천에는 다리가 없었다. 모두 징검다리였다.
 하천 주변은 밭이었고 하천은 작은 돌과 모래, 그 사이에 풀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당시 하천에 어찌나 돌이 많았던지 사람들은 집 담 쌓을 돌을 하천에서 가져다 썼다. 
 60년대 이뤄진 직강공사는 곡괭이 공사였다. 당시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민부삼(읍 해리)씨는 서민들이 곡괭이로 해남천 직강공사가 이뤄졌다고 회고했다.
 60년대 직강공사 이후에도 해리방면 하천에는 다리가 없었다. 그러다 80년대 정시채 전 국회의원에 의해 해성교가 세워졌다.
 해남천은 수시로 범람했다. 범람할 때 가장 피해를 봤던 곳이 남동지역이었다. 따라서 당시 수리조합의 일 중 중요한 것이 금강골 수위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직강공사 이후는 더 큰 물난리를 겪었다.
 80년대 에그니스 태풍 때 금강골저수지가 무너질 위험에 처하고 남동과 고도리가 침수되고 천변교가 붕 떠버리는 초미의 물난리를 겪게 된 것이다.
 해남여중과 해남여고로 급히 대피했던 저지대 주민들은 굽이굽이 돌던 하천을 무리하게 직강공사로 만든 것이 재앙을 불러왔다고 한탄했다.
 해남천이 다시 생태하천 명목으로 공사에 들어간다. 옛 해남천을 그리워하는 주민들은 생태하천공사가 물고기가 뛰놀고 쉼을 즐길 수 있는 하천공사로 이어지길 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