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신문/해남신문
유물 지키고 재산도 당당히 보존
희망의 시작 땅끝해남
2009. 3. 13. 07:31
유물 지키고 재산도 당당히 보존 |
가 볼 만한 종가 - 종부가 지켜온 500년 녹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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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관광공사가 3월 가볼만한 종가댁으로 선정한 녹우당은 500년 역사를 자랑한다. 500년의 전통을 유지해 온 데는 가문을 지키려는 종부들의 역할이 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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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자 상속·양자제도도 재산증식 역할
우리나라에는 많은 명문가가 있었지만 집안의 전통과 가계(家系)를 오래도록 이어간 집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녹우당이 500년 간 유지돼온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 집안 종부들의 역할이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고산의 8대손 종부인 광주이씨이다. 해남윤씨 댁으로 시집온 광주이씨는 불행히도 결혼과 동시에 남편인 윤광호를 잃고 만다. 18세기 후반을 넘어 19세기 들어 해남윤씨는 몇 대 째 단명하거나 아들을 얻지 못해 가문이 쇠락하는데 겨우 얻는 광호마저 신행길에서 돌아오자 죽고 마는 비운을 맞는다. 결혼한 지 불과 3일 만에 남편을 잃은 광주이씨는 남편도 없는 상황에서 종가 살림을 43년간 맡으며 파란 많은 일생을 살게 된다. 17세에 결혼하여 신행 전에 홀로된 광주이씨는 그 한스런 삶을 수필형식인 '규한록'에 남긴다. 녹우당 고산유물전시관에 보관된 규한록은 광주이씨 부인이 순조 34년 3월 초사일에 탈고한 순 한글 작품으로 조선후기 우리 한글문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규한록에는 집안 숙부들의 섭정과 이들의 간섭을 뿌리치며 대항했던 젊은 종부의 삶과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멀리서 양자를 데려온 과정들이 눈물겹게 그려져 있다. 양자로 들어온 주흥은 나중에 3남4녀를 낳고 관직에 진출해 가문을 다시 일으킨다. 현재 녹우당 해남윤씨가에선 광주이씨를 종가를 다시 일으킨 영부(英婦)로 추앙하고 있다. 녹우당에는 규한록을 비롯해 문화재 가치가 높은 수천 점의 자료가 보관돼 있다. 이처럼 많은 유산이 잘 남아있는 것 또한 이 집안 종부들의 노력이었다는 게 해남윤씨가의 이야기다. 난이 일어나거나 집안에 위기에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지키고 보관한 것이 선조들의 유물이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또 다른 광주이씨이다. 광주이씨는 6·25동란이 일어나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과 문서들을 벽장에 숨기고 이를 흙으로 발라 보관한 인물이다. 광주이씨는 윤정현의 아내로 조선왕조 마지막 종부로 살다간 여인이다. 해남윤씨가의 번영과 영광은 이 집안 특유의 가풍도 한몫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장자 상속제와 양자제도이다. 녹우당의 입향조인 어초은 윤효정은 해남의 가장 큰 부호였던 정호장의 딸을 아내로 얻어 지금의 녹우당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조선 초기만 해도 딸도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았던 제도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남녀균등의 재산분배 원칙이 무너지자 해남윤씨가는 장자중심으로 재산을 상속, 철저히 재산의 흩어짐을 막았다. 또한 집안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장자도 재산을 임의대로 처리하지 못하도록 장치를 마련했다. 공재의 아들 윤덕희가 남긴 '화회문기'에는 종가 소유 땅을 종손도 절대 매매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해남윤씨는 종가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양자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양자는 윤효정 이래 12대 윤광호에 이르기까지 4명이 입양되는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도 양자로 들어온 예이다. 당시 양자는 친부와 양부 모두에게 재산을 상속 받았기 때문에 녹우당 경제력을 보태는데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녹우당이 우리나라 대표 종가 댁으로 떠오른 것은 집안을 지키려고 애써온 종부들과 장자 상속제 및 양자제도가 중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