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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시가 상자. 아스팔트 농사꾼 정광훈 의장님께서 2003년 멕시코 칸쿤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기념으로 지갑을 탈탈 털어 사오신 뒤 한 상자를 내게 통째로 선심을 쓰시어, 기쁜 날이면 한 대씩 야금야금 태워먹던 중, 의장님은 볕좋은 봄날 땅으로 돌아가시고, 저 거룩한 상자는 유품이 되고 말았던 바. 모처럼 한개비 꺼내어 불을 붙였으나, 한모금 빨기도 전에 눈물이 핑 돌아, 이번 추석 때쯤 망월동에 지니고 가서, 골초 애연가 의장님 무덤에 얼굴이나 한번 비빈 뒤, 유품에 불을 붙여 마른 연기나 후후 불어드리는 수밖에.
우두둑우두둑, 유리창에 내리치는 작달비 소리에 눈을 떴다. 아내와 다른 남자가 데이트하는 꿈을 꾸었다. 개꿈이었다. 속이 보깼다. 간밤에, 간만에 마신 술 때문에. 국물이 당겼다. 어제 자연드림 라면 공장에 놀러 갔다가 구호품으로 받은 ‘자연드림 라면 5종 세트’ 꾸러미를 풀었다. 비빔면과 짜장면 따위 국물 없는 것들은 제쳐두고, 포장지가 국방부 전투식량을 연상케 하는 그냥 라면도 제쳐두고, 하얀잠뽕과 해물라면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짬뽕을 간택하여 정성껏 끓였다. 청량고추도 썰어 넣었다.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짬뽕 국물에 오래된 달걀 하나를 툭 깨트려 풀었다. 콧물 같은 액체가 주르륵 흘렀다. 고린내가 진동했다. 빌어먹을 곯은 달걀, 빌어먹을 짬뽕, 빌어먹을 장마. 장마 통에 내려진 달걀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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