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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양심' 이사장 이해동 목사

희망의 시작 땅끝해남 2010. 7. 13. 07:30

'행동하는 양심' 이사장 이해동 목사
어려운 일 도맡아 원만히 해결하는 '설거지 꾼'
2010년 05월 14일 (금) 15:00:29 해남신문 hnews@hnews.co.kr

5월이다. 라일락과 아카시아향기가 가득한 좋은 계절이지만 5·18의 아픔이 새겨진 역사의 달이기도 하다.
이맘때면 특별히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민주주의와 역사를 생각하고 이를 위해 일하다 죽음과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해남군 황산면 출신 이해동 목사님(77)은 자신이 직접 3·1민주구국사건과 80년 5·18때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내란음모죄로 몰려 두 번의 옥고를 치루기도 했지만, 지난 정부에서는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으로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함을 당한 무고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준 특별한 역할을 했다.
지금도 개혁세력의 분열을 걱정하며 민주통합 국민행동 운동에 앞장 서 계신 목사님을 경기도 일산 성저마을에 있는 자택으로 찾아가 말씀을 들었다.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목사님께서 일찍부터 기독교장로회 교회에 계시고 이북출신 인사들과 교분이 깊으셔서 그런지 우리고장 해남출신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무슨 그런 오해를…. 정확히 해남군 황산면 우황리라고 왜 공룡발자국 발견된데 있지 않습니까? 인조대왕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이신 6대 조부 여릉(驪陵)군 明자錫자 어른께서 해남에 귀양을 와 터를 잡으신 곳이 우황리예요. 증조부가 참판을 지내셨는데 그 곳에서 이참판 댁이라고 하면 많이 알죠. 국민학교 5학년 때 해방이 되었는데 황산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렇군요. 남녁 끝 해남에서 어떻게 진보적인 기독교장로회 목사가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 보면 대부분의 동네사람들에게 하대를 하는 전형적인 양반출신인데 어머니가 목포 정명학교를 졸업한 기독교인이셨어요. 어머니의 영향으로 집안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는데 어머니는 어느 날 소위 계급타파를 시도했죠. 남자들의 경우 장가를 갔으면 양존을 하고, 여자들은 나이기준으로 연상이면 존대, 연하면 '하게'라는 평존으로 바꾸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형식적 계급타파가 뼈 속까지 스며들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자 동네 분들과 하나가 되자는 생각에 마을 동각에 교회를 열기로 했지요. 목포 중앙교회 이국선목사님의 지원으로 전도사 한 분이 매주일 배를 타고 와서 예배를 보았는데 처음 예배를 보던 날 중앙교회 풍금을 그 시골까지 지고 와 예배를 보던 기억이 납니다.

모친의 영향으로 신앙을 갖게 되고 목회를 하시게 된 것이군요?

중학교는 목포에서 다녔어요. 목포공업중학교라고 6년제인데 6.25 후에 분립되면서 목포제2중학교와 목포공고로 나뉘어졌죠. 고등학교는 목포고등학교 4회로 원래 2회여야 하는데 전쟁 통에 어쩌다 보니 2년이나 늦게 들어가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김재준목사님이 학장으로 계시던 한신대에 들어가게 된 게 그 후 목회생활과 민주인사들과의 교분으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지요.

고 김대중대통령은 목포상고출신이시고 평생 동지처럼 지내셨는데 그분과는 고향에서 만나셨습니까?

천만에요. 연령대로 봐도 목포에서 직접 만날 수는 없죠. 1954년 그 분이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처음 출마했을 때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유세장에 연설을 들으러는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직접 대면한 것은 1976년 3월 8일인가, 9일 서소문에 있던 검찰청 대기실에서였습니다. 이른바 3.1민주구국사건으로 일주일 가량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은 후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되기 위해 한 밤중에 검찰청으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고 대기실에 오니 거기에 김대중대통령이 계셨습니다. 그 때 함께 구속되고 재판을 받았던 분들이 문익환 목사님, 윤반웅 목사님, 서남동 목사님, 문동환 목사님, 이문영 박사님, 안병무 박사님, 신현봉 신부님, 문정현 신부님, 함세웅 신부님, 윤보선 전대통령, 함석헌 선생님, 정일형 박사님, 이태영 박사님 등인데 많이 고인이 되셨네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가까이에서 접하신 고 김대중 대통령의 면모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두 번 감옥생활을 했는데 우연히도 두 번 다 김대중대통령과 함께였습니다. 같은 이유로 감옥생활을 하면서 그 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한층 새롭고 두텁게 할 수 있었다할까요?
첫째 부드럽고 섬세한 그 분의 인간성입니다. 76년 당시 재판이 매주 토요일마다 대법정에서 열렸는데 우리 재판이 있는 날이면 검찰청이나 법원의 다른 모든 업무는 중단되고 민간인들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 가운데 온종일 우리 재판만 엽니다. 관련 피고인들 모두가 독거수감 되어 평소에는 접촉이 불가능한데 재판이 있는 날은 예외죠. 재판정에 오고가는 차 안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 분의 인간성과 따뜻함에 놀랐고 두 번째는 그 분의 실력입니다. 3.1민주구국사건 관련자들은 모두들 상당한 실력을 갖춘 학자들이 많았는데 함께 나누는 대화에 전혀 거침이 없습니다. 정치, 경제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신학이나, 철학, 특히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정말 놀라웠죠. 세 번째는 그 분의 돈독한 신앙심입니다. 몇 번이나 죽음에서 살아나온 개인적 체험을 개인구원이나 영혼구원의 저급한 차원으로 매몰시키지 않고 사회구원의 동력으로 삼는 건강한 신앙의 소유자라는 점은 정말 믿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지난해 김대중 대통령 서거 후 재야원로급 인사들이 주축이 돼 '민주통합시민행동'이란 단체를 만드셨는데 그 후의 진전 상황이 궁금합니다. '민주통합시민행동'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요.

사실 김대중대통령 시절과 노무현대통령 시절 10년 동안은 재야단결의 필요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지요. 오히려 정권감시 정도였다고 할까. 그런데 현 정부에 들어와 걱정하는 목소리가 이심전심 전달되고 노무현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민주개혁진영이 연합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대중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의 유지인 민주, 민생,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뭔가 행동이 필요하게 된거죠.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거예요. 80년대 말 6월항쟁 이후 시민운동이 확산되지 않았습니까? 인권운동뿐 아니라 환경운동, 여성운동, 소비자운동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많아지면서 저변확대는 되었는데 그만큼 구심점은 약화 된 거죠. 민주대연합시민행동은 시대적 요청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지만은 않더군요. 누가 그것을 하느냐에 따라 내용도 달라지고 비슷한 이름의 단체가 네 개나 생기고요. 허허.

행동이라면 정치적인 활동을 연상시키는데 목사님은 바쁜 일상을 사는 시민들이 어떤 행동을 해주기를 바라십니까?

김대중 대통령 이야기를 좀 더 하지요. 지난해 6월 9일입니다.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김대통령께서 준비위원들을 모아 수고했다며 점심을 사주었습니다. 여의도 63빌딩 어디였는데 울먹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정권이 잘못을 하면 나쁘다고 말을 해라, 항의도 하고, 글을 쓰고, 투표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벽이라도 향해 욕을 해라"라고요.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그 분은 전직 대통령이라는 편안한 권좌에 앉아 계시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분의 '행동하는 양심'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우리 역사에서 계속 계승, 발전시켜야 할 위대한 가치입니다. 어느 정당이나 개인이 사유화할 것이 아니고 역사가 공유해야할 가치라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DJ는 말 바꾸기 선수'니 '실용주의자'니 하지만 민주주의와 민족화해라는 원칙과 이상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으며 두 가지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방법론으로서 실사구시를 선택한 것이라고 봅니다. 거의 도통한 경지이죠.
이제 곧 지방선거가 실시되는데 그 분이 살아계셨으면 틀림없이 투표를 통한 '행동하는 양심'의 실천을 다시 한 번 강조했을 것입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유, 서민경제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관계 지키는 이 일에 모두 들고 일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돌아기시기 전 6·15기념식에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선 투표라도 잘 해야 합니다.

언론인 김종철 선생님은 목사님을 가리켜 '설거지 꾼'이라는 표현을 했더군요. 그만큼 어려운 일을 많이 맡으시고 원만히 해결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겠지요. 특히 지난 정부에서는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크게 실적을 남기셨는데요.

내가 인연을 맺은 건 김 전 대통령인데 이상하게 노대통령시절에 감투를 많이 썼어요. 충북에 있는 서원학원 이사장, 또 덕성여대 관선이사장으로 일했고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진상규명법위원회와 베트남 전 민간인학살진실위원회 대표 등인데 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장으로 2006년에서 2008년까지 일했던 게 제일 큰 보람입니다. 진정 건수 600건 중 395건이 해결되었고 2009년까지 나머지도 다 해결되었다고 들었어요. 단지 유일하게 결론을 짓지 못한 게 '5·18발포명령자가 누구인가'인데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가지요.

목사님으로서 자의반 타의반 정치적 행동도 많이 하셨는데 목사님이 보시는 정치란 무엇입니까 ?

사람들은 정치혐오를 얘기하지만 정치를 떠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국민 생활 자체가 정치죠. 이제는 시민들이 오히려 정치의 품격을 높이는 역할을 적극 해야 합니다.

건강에 굉장히 좋아 보이는데 요즘은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김대중 대통령의 유지를 살려가는 '행동하는 양심'이사장 외에 평화박물관 건립과 언론인 송건호선생 기념사업인 청암언론문화재단 일을 거들고 있습니다. 또 취미로 시작한 서예에 요즘 한창 재미가 붙었어요. 자랑하나 할까요? 한국전통서예협회 공모전에 주기도문을 행서와 해서, 초서로 써 세 개를 냈는데 행서와 해서에서 입선, 초서에서 특선을 했답니다. 5월 12일부터 전시회도 갖는다고 해요. 하하하.

평생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자 설거지 꾼으로 사셨으니 이제 삶을 좀 즐기셔도 되겠어요. 언젠가 이해동 서예개인전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원자 편집고문/언론인, 호남대겸임교수>

연보

이해동 목사는 평생 두번의 옥고를 치렀다. 76년 3월1일 있었던 '3·1민주구국선언사건'과 80년 5월 신군부에 의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때 각각 1년 가까이 옥살이를 한 것. 3·1민주구국선언사건은 유신통치가 극에 달한 76년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이문 영 서남동 등 10명이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하는 구국선언을 발표한 일이다. 당시 33세로 한빛교회를 이끌던 이목사는 선언문 등사를 맡았다. 
석방 뒤 한빛교회를 운영하며 구속자 석방운동을 벌였으나 이 활동은 79년 10·26 직후 계엄령으로 중단된다. 80년 5월에 시작되어 8월14일 열린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군법재판은 김대중을 죽이기 위한 신군부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읽히는 '죽음의 의식'이었다.
81년 5월 1년 만에 석방된 후 83년 영국연수를 거쳐 84년부터 88년까지 독일의 한인교회에서 시무했다. 서울 한우리교회를 개척, 2002년까지 담임목사로 일하다 자원은퇴 후 재야시민운동에 앞장서 오고 있다.

약력

1934 전남 해남군 황산면 출생
196 2한신대 졸
1961~1964 목포 항도교회, 중앙교회 전도사
1965.11 경기노회 목사안수
1976 '3·1민주구국선언사건'관련 구속, 295일간 옥고
1980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관련 구속, 1년간 옥고
1994~1995 제66회 서울노회 노회장
2001~2005 학교법인 덕성학원 이사장
2006~2008 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2009. 8 김대중대통령 국장 시 예배인도
현. 행동하는 양심 이사장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대표
청암언론문화재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