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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평의 시골마을 이발관

희망의 시작 땅끝해남 2009. 1. 25. 20:10

2.5평의 시골마을 이발관
이름도 그럴싸한 간판도 없지만 넉넉함이 있어 좋아
2009년 01월 23일 (금) 14:32:09 박영자 기자 hpakhan@hnews.co.kr

   
 
  삼산면 원진마을 안에 있는 이발관. 소박하면서도 넉넉함이 있어 주민들은 이곳을 사랑방으로도 이용한다.  
 
   
 
  이발관 주인 김주일씨.  
 
삼산 원진 김주일씨

2.5평의 작은 시골마을 이발관. 마을 안에 있어 아는 사람들만 이용하는 이 작은 이발관은 이름도, 그럴싸한 간판도 없다. 시멘트벽에 이발관이라는 글씨만 그저 적혀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작은 이발관에는 다른 도회지 이발관에서 느낄 수 없는 사람냄새가 있다.

좁은 공간에 달랑 의자 둘 뿐. 더 이상의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지만 인근마을 주민들에게 있어 이 작은 공간은 수년간 서로가 부대껴온 장소이자 반가운 사람 만나는 사랑방이다.

삼산면 원진마을에서 이름도 없는 이 작은 이발관을 운영하는 이는 김주일(66)씨. 이 장소에서 이발관을 운영한지도 10여년이 지났다. 

지난 19일 큰길가도 아니고 동네 한가운데 있어 누가 찾아올까하는 생각으로 이발관을 찾았다. 그런데 손님이 꽉 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둘밖에 없는 의자에 손님이 모두 앉아 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발관에 여유 공간이 없어 밖에서 대기하는 손님도 있다.

하루 평균 6~7명의 손님이 찾는다는 이 작은 공간에 그날은 손님이 꽤 있었다. 다가올 설 명절과 전날 일요일 문을 닫았기에 이날은 손님이 많단다.

주 고객은 인근 마을 사람들이지만 화산면이나 읍에서도 찾아온다. 김씨의 이발 솜씨를 알기에 한번 인연을 맺고 나면 단골이 된 경우다.

김씨는 60년대 초반부터 원진마을 큰 도로변에서 이발관을 운영했었다.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고 미장원이 그리 많지 않던 때라 이발관은 꽤 붐볐다. 동네 조무래기부터 노인들까지 인근마을 남자들은 모두 김씨의 손님들이었다.

그러나 김씨는 동생들과 자녀교육을 위해 한때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등 외국에 나가서도 돈을 벌었다. 10남매 중 장남이었던 김씨는 동생들 뒷바라지도 마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찾을 즈음 고향으로 다시 내려왔다.

연로한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서다. 효자로 잘 알려진 김씨는 어머님을 모시면서 동네 농협창고 한 귀퉁이에 이발관을 차렸다. 이곳에 이발관이 들어서자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사랑방으로 삼았다. 손님이 없을 때는 좁은 이발관에서도 담소를 즐기고 손님이 있거나 찾는 사람이 많을 때는 이발관 밖 평상에서 담소와 쉼을 즐긴다.

김씨는 이발관을 운영하면서 농사도 짓는다.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그는 낮에는 이발관을 운영하고 아침저녁으로는 들녘에 나가 농사도 짓고 소도 키운다.

오늘처럼 손님이 많을 때는 부인이 이발관에 나와 손님들 이발과 면도를 거들어준다. 넉넉함이 있고 사람 냄새가 나는 이곳 이발관은 요금도 예전 그대로이다. 자신이 가진 기술로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즐겁고 자신의 작은 공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 삶이 즐겁다는 김씨. 그래서 손님이 많든 적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단다.

오늘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자가용이 아닌 오토바이와 트럭, 경운기를 끄는 이들이다.